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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한우물 저존제 양대박 소나무

운당 2025. 1. 23. 09:21

남원 한우물 저존제 양대박 소나무

 

섬진강이 임란 의병장의 마을 옥과 합강리를 내려가면 곡성 동악산(735m) 북쪽 계곡인 청계계곡이다. 이곳은 임란 의병장 양대박(1544~1972) 유적지다.

남원에서 부유하게 살던 양대박은 가산을 정리하여 이곳 곡성 청계동에 정자 9, 안채 2, 노비 살림집 14동 등 총 25동의 건물을 짓고 둔전마을을 일궜다. 군량미, 병기와 군복 등 군수품을 비축하여 장차 왜란에 대비하였다.

계곡 들머리에서 물길을 따라 1.5Km쯤 오르면 폭포석당이고 500m쯤 위쪽은 집곳, 사시암골이라고도 했던 사수석당이다. 두 곳 석당 이름은 떨어지는 물이 암반에 못을 만든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 일대에 양대박이 둔전마을을 일군 임란 이후부터 1950년 무렵까지 농가와 전답, 자두과수원이 있어 자두와 산약채 등이 수입원이었다.

임란에는 마을 사람 모두가 양대박을 따라 둔전병이자, 의병이었다. 양대박은 함께 거병한 이웃 고을 유팽로와는 이종형제였으며, 둘 다 임란 초기에 왜와의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유팽로는 임란 최초의 의병장이기도 하다. 이 유팽로가 515, 아래 고을인 곡성 청계동 계곡의 들려 이종형 양대박과 만났다. 두 사람은 구체적인 출병을 의논하고 담양의 고경명에게 의병 창의의 편지를 보냈다. 무술은 물론 글씨와 문장에도 뛰어난 양대박의 의병 창의격문은 유려한 문장과 고결한 기개로 많은 사람을 감동 시켰다.

마침내 68일이다. 임란 최초의 대규모 의병부대는 고경명을 대장(황기)으로 추대하고 전부장 안영(흑기), 후부장 양대박(적기), 좌부장 고인후(백기), 우부장 유팽로(청기)가 되어 출정하였다.

614일이다. 의병 추가 모집을 위해 양대박은 고경명의 둘째 아들 고인후와 함께 고향인 남원으로 갔다. 그리고 열흘 뒤인 24일 천 5백여의 의병과 함께 고경명군과 만나기로 한 전주를 향했다. 의병군이 임실군 강진면 갈택리에 이르렀을 때이다. 농민들에게 인근 운암 장곡에 1만여 명의 왜병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양대박은 군사를 셋으로 나누었다. 큰아들 경우에게 5백여 의병을 이끌고 고경명에게 가게 하고, 둘째 아들 형우에게 5백여 의병을 주어 골짜기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5백여 의병과 함께 방심하고 있는 왜병을 기습 공격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왜병이 허둥지둥 어찌할 줄을 모를 때, 둘째 아들 형우의 의병이 왜병의 뒤를 공격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양대박 의병군은 왜병 참수 1,207, 철갑옷 42, 대소총 79, 전마 95필을 빼앗고 김수현, 박재운 등 포로 수백여 명도 구출했다. 그리고 아군의 전사자는 40여 명에 불과했으며, 양대박 혼자서 왜병 50여 명의 목을 베는 등 눈부시게 전장을 누빈 참으로 통쾌한 승리였다.

하지만 77일이다. 완주를 지나 전주로 향하던 양대박은 그만 알 수 없는 괴질에 걸려 자리에 누웠다. 부축을 받아야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아들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난 양대박은 자신이 아끼던 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이 49살이었다. 이날 하늘에 흰 무지개가 걸리고 밤새 뇌성이 울었다.

양대박과 1595년 군량을 모아 명군을 도운 그의 아들 경우를 기리기 위해 1796년에 세운 정려인 부자충의문이 그의 생가 마을인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에 있다. 또 기념관과 묘는 남원시 화정동 한우물 마을의 저존제와 남원양씨 선산에 있다. 여기 기념관과 묘소를 지키는 소나무는 만대에 이르러 양대박의 고결한 기개와 정신을 이어가는 표상이 될 것이다.

남원 저존재 양대박 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