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지곡면 개평마을 처진 당송
함양은 양반 씨족이 모여 살던 영남 유림의 고을이니 흔히 좌 안동, 우 함양이라고 일컫는다. 또 함양의 그 대표 반촌이 지곡면 개평마을이다.
개평은 마을을 감싼 서북쪽 도숭산(1041m)의 두 골짜기에서 흘러온 지곡천과 평촌천이 만나는 곳의 삼각형 터이다. 마을 이름 개평은 도숭산의 산 모양과 지곡과 평촌의 두 물줄기를 본뜬 개(介)자 모양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예전엔 개화대 또는 개우대 마을이라고 했다 한다. 사람으로 치면 아랫배이니 풍성하고 넉넉한 출산의 터이다.
또 육십령을 내려온 남강이 서상, 서하면을 지나 지곡면에서 이 개자 모양의 지곡과 평촌 두 물줄기를 두 손으로 받으니, 도숭산이 감싸주고 남강이 품어주는 평(平)안의 터이다.
개평마을은 오래전 경주 김씨 등이 살았는데, 14세기에 정여창의 증조부인 정지의가 처가인 이곳으로 왔고 뒤따라 풍천 노씨도 들어왔다.
1490년 과거에 급제 안음현감 등을 지낸 정여창의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를 지낸 정육을, 어머니는 경주 최씨이다. 김굉필, 김일손 등과 함께 김종직에게 배웠다. 1498년 연산군의 무오사화에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부관참시당하는 고난을 받았지만,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성리학의 5현으로 칭송받는다.
154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두루 벼슬을 지낸 노진도 이곳 개평마을 출신이다. 참봉 노우명이 아버지, 사성원 권시민의 딸이 어머니인 노진은 조선의 청백리 중 한 사람이며 도승지가 되었음에도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외직인 담양부사, 진주목사를 지낸 효자였다.
이 노진의 선조인 노숙동이 이곳 함양 개평마을에 들어온 사연은 전설 같다. 그러니까 노숙동이 과거에 급제하고 이곳을 지나다가 종처럼 생긴 둥근 바위 옆에서 낮잠을 잤다. 그때 김점도 낮잠을 자다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김점은 하인에게 마을을 살피게 했고, 종바위 옆에서 낮잠을 자는 노숙동을 발견했다. 김점은 노숙동을 극진히 대접하고 사위로 삼았다.
이 김점은 정복주의 사위였고 정복주는 정여창의 할아버지이니 개평마을의 정씨, 노씨, 김씨는 친족 관계이기도 하다.
이곳 개평마을에 3~4백 년의 소나무 군락지가 있다. 또 이들 소나무를 거느리는 5백여 살의 처진 소나무가 있다. 마을을 감싸듯 낮은 언덕은 마치 한 마리 용이 엎드린 듯한데 용의 머리는 지곡초등학교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활엽수를 수염과 뿔, 갈기로 세우고 마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늘 푸른 기상을 불어넣어 주는 형상이니 마음이 뿌듯하다.
이 용이 품고 있는 개평마을은 하동 정씨 대종가, 풍천 노씨 대종가, 오담고택, 노참판댁 고가 등 한옥들이 흙담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즐비하니 가히 한옥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정여창 고택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처음 이곳에 들어와 어렵게 살던 시절 안주인이 밭에서 돌아오는데 뱀 한 마리가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고 길을 앞질렀다. 한참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데, 뱀이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안주인은 뱀을 행주치마에 싸 항아리에 넣어 성주님으로 모셨다. 그 뒤로 가세가 일어났다고 한다.
여기 지곡초등학교에 머리를 둔 용의 언덕길 처진 소나무인 ‘당송’ 아래에 ‘종암(鍾巖)’ 바위와 우물이 있다.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이 신령스런 종암은 ‘배의 형국’인 마을에 우물을 더 파지 말라는 경종이고 당송은 배의 돛이라 한다. 오래된 마을이라 이야기도 많다. 마음의 고향을 잃거나 잊거나, 그립다면 이곳 개평마을에 들릴 일이다. 평화롭고 따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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