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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수승대 수송 소나무

운당 2024. 8. 30. 05:51

거창 수승대 수송 소나무

 

수승대는 영남 제일의 동천이라는 안의삼동 중 원학동의 다른 이름이다. 안의삼동(安義三洞)은 함양 화림동과 심진동, 거창 원학동의 빼어난 절경을 가리키는데 이 세 곳의 옛 지명이 한때 안의현이었기 때문이다.

거창 원학동의 수승대의 첫 이름은 수송암이다. 조선 후기 문신인 남공철(1760~1840)1815년에 간행한 금릉집 12권의 풍패정기삼한시대에 여러 차례 군사를 일으켜 서로 공격했다. 사신들도 연달아 이르렀는데, 빈객이 모두 여기서 전별하던 곳이라 이로 인해 이름이 되었다.’고 썼다. 여기서 서로 공격한 나라는 백제와 신라였으며, 오가는 사신들이 국경을 넘으며 근심 걱정으로 헤어지던 곳의 바위여서 수송암이다. 또 여기 수승대는 입선출인의 터이다. 그러니까 들어가서 선인, 되돌아 나와 다시 인간이 되니 바로 무릉도원 별천지이다. 그리고 한번 가보면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다.

처음 이름 수송대(愁送臺)가 수승대(搜勝臺)로 바뀐 사연이 있다. 154313일이다. 퇴계 이황(1501~1570)이 장인 권칠(1483~1545)의 회갑을 맞아 처가인 안음(안의) 영승마을을 찾았다. 퇴계는 영남 제일의 동천 중 하나인 수송대를 보려 했으나, 조정의 급한 일로 7일에 한양으로 가야 했다. 이때 퇴계는 기제수승대라는 시를 지어 요수 신권과 갈천 임훈에게 보냈다.

신권(1501~1573)은 수송대 아래 황산마을에 은거하면서 1540년에 현재 구연서원 자리에 강학당 구연제와 계곡 건너 맞은 편에 독서할 수 있는 함양제를 지었다. 1542년에는 함양제 가까이 누정인 요수정을 짓고 내에 다리까지 놓아 일대를 별서정원으로 가꾸었다. 그러던 중 퇴계의 시를 받고 이곳 거북바위에 수승대라는 이름을 새겼다.

한편 임훈(1500~1584)퇴계 선생이 대의 이름을 수승이라 고치려 하기에 이 시를 지어 해명한다면서 가는 봄을 근심함이 아니라, 그대를 보내는 것이 시름일세라는 칠언절구를 썼다. 떠나보내는 것이 시름(愁送)이 아니라, 헤어짐 그 자체가 시름(愁送)이니 곧 시름은 인지상정의 자연스러움이다. 그러한데 뭐가 어째서 수송을 수승으로 바꾼다는 것이냐? 이다.

이렇듯 신권과 임훈의 다른 견해는 훗날 이곳 수승대를 두고 두 문중의 소유권 송사에까지 이르렀다. 192813일 자 조선일보의 거창 임, 신 양 씨의 수승쟁탈전내용인 수승대 일대는 국유하천이므로 두 문중의 소유권을 불허한다가 그것이니 사연인즉 이렇다. 1810년이다. 안의현감 한복연이 이곳 수송대 거북바위에 퇴계명명지대갈천장구지대라 쓰고 이황과 임훈의 시를 각자로 새겨 놓았다. 이를 보고 무슨 소리? 나도 질세라구연제와 요수정을 지었던 신권 문중에서도 거북바위에 요수장수지대란 각자를 새겼다.

결국, 이런 사소한 일이 100년 넘어 길고 긴 송사가 된 것이다. 아무튼, 별유천지에 신선도 인간도 그리고 비인간도 사는 법이고 그게 또 세상만사이다. 그런데 신권과 임훈은 처남 매부지간이다. 임훈은 조선 중종 때 학자 임득번의 큰아들이고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의 유력가문이다. 그리고 이웃 마을 위천면 황산리의 유력가문인 신권은 임득번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여기 거북바위는 위쪽에 살던 거북이가 이곳 거북이를 쫓아내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서 된 바위이다. 이 신령스러운 거북바위에서 백제와 신라의 사신들이 수심의 작별을 했거나, 국경을 지키던 양국 병사들이 아름다운 절경에 수심을 잊었거나, 퇴계가 시름 대신 아름다움을 찾았거나 다 지나간 일이다. 바위의 늘푸른 소나무와 선비들이 붓을 빨았던 계곡의 푸른 물에선 누구나 선인이다. 여길 나가면 다시 온갖 시름의 인간이겠지만. 무슨 걱정이랴?

거창 수승대 수송 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