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웅은 고조선을 세운 단군의 아버지이다. ‘삼국유사’는 ‘하느님인 환인의 서자(庶子) 환웅이 천부인 3개와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백두산) 신단수에 신시를 열었다. 풍백·우사·운사와 더불어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 등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렸다. 이때 호랑이와 곰이 사람 되기를 원하자 쑥과 마늘을 주었다. 그 뒤 사람이 된 웅녀와 단군을 낳았다.’고 기록했다.
이 환웅 서자는 첩의 자식이 아니다. 모계사회에서 아이들을 마을 서쪽 집에서 키우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또 이 ‘여러 서(庶)’ 자는 돌화로에 불을 지피는 모습의 형성자이다. 마을의 대장간에서 사냥과 전투의 무기, 농기구 만드는 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서방님은 글방 서당(書堂)에서 공부하는 사람, 남편의 높임말, 결혼한 시동생을 부르는 말이다. 또 하나 서쪽에서 온 ‘서방(西方)님’이 있다. 1만 2천여 년 전 빙하기 뒤 북방 민족이 톈산에서 해 뜨는 동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먼저 이동하여 정착한 부족에게 뒤를 따라 이동해 오는 부족은 서쪽에서 온 서방님이었다.
그러니까 환웅이 서쪽 톈산에서 동쪽의 태백산으로 온 까닭은 앞서 정착한 부족의 웅녀를 만나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달마가 백팔번뇌 가득한 사바세계 동쪽에서 극락정토인 서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불교에서 부처가 되는 길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교종의 교리와 경전을 중심으로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고 하나는 선종의 참선을 통해 수행하는 것이다.
6세기 초 달마가 서쪽 인도에서 동쪽 중국에 와 양나라 무제를 만난 뒤 양쯔강을 건너 북위의 쑹산 소림사에 머물며 선종을 열었다. 이 선종의 교육방법으로 속세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화두가 있다. 그러니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동쪽으로 간 까닭이라고 돌려 말하기 같은 것이다. 중국에서 인도가 서쪽이니, 달마는 동쪽으로 간 것이다. 우리네 서쪽에서 온 서방님도, 서쪽에서는 동쪽으로 간 동방님이다. 이 말은 서쪽이건 동쪽이건 다 자기 위주이니, 서고 동이고 다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라는 것이다.
아무튼, 달마가 다시 서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달마는 528년 10월 5일 입적하여 쑹산에 묻혔다. 그 3년 뒤 위나라 송운이 인도에 사신으로 가던 중 파미르에서 신발 한 짝을 손에 든 달마를 만났다. 송운이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자 ‘나는 서역으로 돌아가오.’ 했다. 송운이 귀국해 황제에게 알리고 그의 무덤을 파니 관 속에 신발 한 짝만 있었다.
이에 문득 요즈음 설왕설래인 천공이 용산에 간 까닭은 무엇일까? 가 궁금하다. 용산 이태원의 굴절된 역사는 임진왜란에서 기인한다.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숭례문, 고니시 유키나가는 흥인지문으로 한양에 입성했다. 또 천주교 신자인 고니시보다 불교 신자인 가토가 더 악랄한 강경파였다. 이 가토의 왜군이 용산 이태원(李泰院) 황학골의 비구니 사찰 운정사에 주둔하며 비구니를 비롯하여 겁탈을 자행했고, 이에 태어난 아이들 등을 수용하니 바로 이민족의 태를 가진 이태원(異胎院)이다. 그 뒤, 병자호란의 사생아가 정착하고 한 말에 청의 군대, 이어 일본군, 다시 미군이 주둔했다. 호란 뒤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이 치욕의 이름을 이태원(梨泰院)으로 바꿨지만, 참으로 기구한 땅의 역사이다.
그런데 왜 이곳에 천공이 다녀갔을까? 청와대를 버리고 이곳을 대통령실로 하였을까? 달마가 서역으로 돌아가듯 악랄한 왜군의 화신 가토 기요마사가 다시 돌아온 걸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가토와 고니시가 입성한 숭례문을 남대문으로, 흥인지문을 동대문으로 하여 조선 고적 1. 2호로 자랑스레 지정했고, 2021년까지 대한민국 국보 1호와 보물 1호였다. 아직도 왜란과 일제강점기의 치욕이 씻기지 않았는데, 용산에 대통령실을 정한 것과 천공이 그곳에 먼저 갔다 하니, 그 까닭이 자못 궁금하다. / 호남일보 3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