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가요와 욱일기
지난 2월 17일은 일왕 나루히토의 생일이었다. 이날 서울의 한 호텔에서 그 나루히토의 생일잔치가 있었고 리셉션에는 이름을 알만한 한국 인사들이 다수 참석, 이도훈 외교부 2차관이 축사를 했다. 이날 한국에서의 일왕 생일 리셉션은 코로나 19 등으로 2018년 12월 이후 4년 3개월 만에 처음이고, 2019년 5월 즉위한 나루히토에게도 처음이다.
하지만 왕이건 뭐건 남의 나라 생일잔치에 시비 걸 생각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이날 생일잔치에서 또 처음으로 ‘기미가요’를 불렀다는 것이다.
산케이 신문은 이 일을 ‘일본 정부는 한국 내 반일 감정 때문에 예년에 국가 트는 것을 미뤘지만 지난해 출범한 윤석열 정권이 대일 관계 개선을 지향하고 일본 정부도 찌그러진 양국 관계를 벗어날 호기라고 판단했다’고 보도했다. 또 일본 대사관은 그동안 행사에서 기미가요를 틀지 않은 것은 ‘참석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배려해왔지만, 과도한 면도 있었다’며 ‘대사관 주최 행사에 국가 연주는 자연스러운 일이며 한일 관계 개선의 흐름 속에서 이번에 당연한 모습으로 하자고 해서 한국 국가와 함께 기미가요를 틀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기미가요는 일본 국가이며 ‘임의 치세는 천 대에, 팔천 대에, 작은 조약돌이 큰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라는 가사 구절의 임은 일왕이다. 또 일왕 제국주의의 지향은 전쟁이었다. 우리 애국가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 추구하는 평화와는 맞서는 개념이다.
더욱 한국 해군 함정이 지난해 11월 6일 일본 해상자위대 창설 70주년 기념 국제관함식에 참석하여 일본 욱일기에 경례한 일은 이순신의 후예인 한국 해군의 치욕이자, 일제강점기에 고초를 당한 선열에 대한 모독이었다. 더하여 20세기 들어 36년여에 이르는 일본제국의 한국 강점과 교과서 왜곡, 위안부, 독도 문제 등은 아직도 실마리조차 풀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독도를 지켜야 할 한국 해군이 독도를 침탈하려는 일본 해군 함정의 욱일기에 경례한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안중근 의사 등 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운 선열께 부끄럽다.
그렇게 일본의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는데, 한국은 정권에 따라 굴욕적인 저자세 외교도 서슴지 않는다. 그럴 때면 생업에 몰두해도 부족한 판에 생병이 나고 속앓이를 하게 된다.
어쩌면 이번 기미가요 첫 연주는 예견된 결과이다. 대통령이 된 윤석열은 2022년 5월 미국에서, 동년 9월 캐나다에서, 2023년 1월 아랍에미리트에서 그 나라 국가가 연주될 때 경례를 했다. 그동안 한국이 작은 국토에도 세계 강대국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는 큰 나라가 되었다고 자부심을 가졌다. 그런데 그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참으로 황당한 처신이었다. 통상적 국제관례는 상대국의 국가 연주에 경례 없이 단정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자국에 하는 것이지, 상대국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서울의 남대문과 동대문을 보물 1호, 2호로 지정했다. 이는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숭례문으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흥인지문으로 입성한 것을 기념하여 1934년 일제가 자랑스레 정한 것이다.
다행히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을 하면서 일제가 지정한 남대문은 ‘숭례문’, 동대문은 ‘흥인지문’으로 이름을 환원하고, 숭례문은 국보 1호, 흥인지문은 보물 1호로 했다. 또 2021년에는 그 순서마저 없앴으니 뒤늦게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욱일기 경례나, 나루히토 생일 기미가요 연주를 보면, 이제 각종 대일 행사에서 대통령이 기미가요를 부르고 욱일기에 경례하는 것만 남았다.
그러잖아도 가스비며 전기세, 소주 막걸릿값까지 천정부지로 오르고 남부지역은 수돗물 대란이다. 대통령이 국민 걱정을 해야지, 국민이 대통령 걱정을 하는 게 정상인 나라인가? 국민의 자존심도 세워주지 못하는 한심한 정권의 작태에, 말 그대로 봄도 춘래불사춘이다.
2023년 2월 22일 호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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