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뫼 나들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 교체를 바라면서
2017년 8월 9일 불볕더위, 말 그대로 염천이다. 되도록 일찍 서둘러 울돌목에 도착하니 9시가 조금 넘었다.
먼저 충무사를 찾았다. 몇 해 전일까?
그때는 충무사가 진도 대교 가는 길인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있었다.
하지만 원래는 문내면 동외리에 있었다. 이러한 사연을 정리해 쓴 필자의 글 ‘호남기행’ 해남편의 명량대첩비에 관한 내용이다.
마침내 제 자리를 찾아 모셔진 대첩비
이때의 일을 기록한 명량대첩비의 비명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는 한글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지은 김만중의 글씨다. 비문은 예조판서 이민서가 지었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 이정영이 썼다. 1688년 3월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박신주가 비를 세웠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패전의 기록이 담긴 이 비를 조선총독부가 가만두었겠는가? 1942년 전남경찰부에 비를 뜯어 서울로 가져오라했고, 친일경찰들은 인부, 목수, 학생들을 강제 동원 높이 2.67m, 폭 1.14m의 비석을 침탈하며 비각을 흔적도 없이 헐어버렸다. 그런 와중에 인부와 목수 등이 원인 모를 병으로 죽자, 대첩비를 없애려던 총독부는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묻어 버렸다.
명량대첩비
1945년 해방이 되자 우수영 유지들이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를 만들어 어렵사리 대첩비를 찾아냈다. 서울역까지는 미군 트럭으로, 목포까지는 열차로, 우수영 선창까지는 배로 가져왔다. 또 풍물패를 조직 나주 무안 등 8개 군을 돌고, 대첩비를 탁본하여 관공서와 학교 등지에 팔아 자금을 마련, 1950년 비각을 짓고 비를 세웠다.
이 명량대첩비는 믿기 어려운 영험을 나타내는데, 국가의 대난을 앞두고 핏빛물이 흐른다. 1910년 일제침탈 때도 인근 어르신들이 흰 무명배로 대첩비의 핏물을 닦아냈고, 1950년 6·25사변, 1980년 5·18민중항쟁 때도 우국의 피눈물을 흘렸다 한다. 1965년 보물 503호로 지정되었고 66년에는 사당인 충무사를 건립했다. 1975년 성역화 사업을 하면서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에 현판도 새로 걸었다. 하지만 글씨는 박정희고, 고개 숙여 참배하는 장군의 영정은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렸다.
그렇게 주민들의 노력으로 명량대첩비는 1950년 해남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시설물들이 들어선 동외리가 아닌 학동리 청룡산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러다 경술국치 100년과 명량대첩비 이전 60년을 맞은 2010년부터 명량대첩비의 원 설립지 이전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 문내면 동외리의 원 설립지로 비와 비각이 우선 이전되었고, 2017년 5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도 이전을 마무리했다.
역시 제 자리로 온 충무사
하지만 아직도 친일화가의 영정 그림이 교체되지 않았으니, 큰 숙제는 풀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 명량해협 진도 쪽에 세워진 진도타워의 장군 표준영정도 친일화가 장우성의 그림이니 가슴만 답답할 뿐이다.
그래도 영정이 무슨 죄랴? 우리 못난 후손들의 불찰과 성의 부족이 죄일 것이다.
어릴 적 들은 얘기다. 1910년 일제 침탈 때 이순신 장군의 비각이 피를 흘려서 할아버지께서 흰 무명배로 피를 닦아내는 일에 동참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생각을 떠올리며 충무사 명량대첩비와 장군의 영정에 깊이 고개 숙여 참배를 했다.
친일 화가의 충무공 영정, 그렇다고 고개 숙이지 않으랴?
이어 명량해협 진도 쪽에 있는 진도타워로 갔다. 진입로를 놓쳐 진도 쪽으로 한참을 더 간 뒤에 되돌아와 가파른 길을 올랐다.
여기도 몇 해 전에 왔을 때는 터만 닦고 있었는데, 여러 조형물을 갖추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진도 타워
진도타워에 오르니 회오리치며 흐르는 울돌목의 거센 파도가 잘 보였다. 안내판을 보며 대형 망원경으로 주변 풍광을 살필 수도 있고, 전시된 자료들도 잘 정선되어 있었다. 다만 친일화가가 그린 장군의 영정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렸다.
한동안 진도타워 6층에서 장군의 전투 조형물과 피섬, 관방성과 옥매산의 강강술래터, 해남과 진도의 산하와 바다를 바라보며 한 여름의 더위까지 식히고 아버지의 고향 마을인 고당리로 갔다.
그냥 성산이라고 부르는 일성산은 우리말로 별뫼다.
해남군 문내면 고당리는 필자의 7대가 내리 살아온 고을이다. 아버지 대에 문내를 떠났고, 이제는 그저 이름만 남은 고향이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중학 시절인 64년, 그리고 74년도인가? 작은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또 그 뒤로 시제 때 두어 번 가본 것이 필자에게는 고향 마을 추억의 전부다.
초등학교 때는 목포에서 배를 타고 지금의 금호호 쪽에서 종선으로 갈아타고 고평리 들판 길을 걸어 고당리로 왔다. 다시 돌아가는 길에 병아리 한 마리가 졸졸 따라와 그 병아리를 마치 강아지처럼 키웠던 추억이 있다. 어미닭이 되어서도 학교를 다녀온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작은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는 목포에서 배를 타고 우수영항구에서 내렸다.
진도타워에서 바라 본 왜선이 몰려온 울돌목 남쪽 바다
그 뒤, 시제 때는 버스를 타고 우수영까지 갔고 이웃면인 황산면과 별뫼에 계신 조상들께 참례를 했다. 그날 처음 별뫼에 올랐고, 옛 집터며, 조상들이 일구었던 논밭도 둘러보았다.
우수영 만호의 딸이셨다는 할머니께서 시집오실 때 지참금처럼 가져오셨다는 밭 이야기, 처마가 가장 높았다는 집 이야기 들이 동화처럼 새겨졌었다.
우수영에서 고당리까지 걸어가며 당숙들에게 들은 아버지의 얘기는 흥미로웠다.
일제강점기인 어릴 적 우수영보통학교를 다닐 때, 전교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다는 아버지 얘기며, 뱀이 득시글거리는 뱀 바위가 있어 무서웠다는 시오릿길의 통학 얘기, 누애방에서 호기심으로 엽초를 말아 피웠는데 누애를 모두 죽게 했다는 사고 얘기 등은 그저 평범했지만, 약간은 충격적인 얘기도 있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아버지께서 큰 황소를 집안 식구들 몰래 끌고 나와 우수영장에서 팔았다고 한다. 그 돈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셨다고 하니 열 두어 살 아버지께서는 꽤나 통이 크셨던 것 같다.
별뫼 아래 4 고현 마을
명치대학을 나와 일본에서 취업을 했던 아버지는 해방 직전에 첫 귀국하였다가, 차일피일 지내면서 해방을 맞았다고 했다. 다시 일본으로 가지 못하고 계실 때 고당리 마을 앞 주막집에서 술을 드시고 취해서 잠이 들었다고 했다.
‘그 집에 마침 새댁이 있었다. 그게 사건이 되어 마을에서 제일 좋은 밭 한 뙈기를 사건무마용으로 주었다. 바로 저 밭이다.’
그 오랜 비밀을 푸는 얘길 하며 당숙들은 웃었지만, 아들인 나로서는 그냥 따라 웃을 수만은 없었다. 선친이 살아계신다면 고개 돌리고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거나 슬그머니 웃기라도 했을 테지만….
그런 저런 추억을 되새기며 고당리 마을 위쪽으로 갔다. 기억 속의 느티나무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 별뫼에서 내려오는 작은 계곡을 따라 느티나무들이 주욱 늘어서 있고, 지금은 남의 밭이지만 할머니께서 지참금으로 가져 오셨다는 큰 밭도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주변이 너무 어수선하고 눈에 거슬리는 물건들이 늘어서 있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일성산과 수령 250여년의 느티나무
일성산을 알리는 비석이 있었다. 글씨를 쓰고 세운 사람들 이름도 있었으나, 이제는 낯선 땅이고 낯선 이름일 뿐이다.
선조들 묘소를 찾아볼까하고 산 쪽으로 올랐으나 그냥 헛걸음으로 내려왔다.
예전에는 고현4리라고 문내면에서 우수영과 쌍벽을 이루는 큰 마을이었다. 고당, 고전, 고대, 고평 등 4개 마을이 5백여 호가 넘었고, 영명중학교까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중학교는 물론 초등학교도 폐교가 되고, 고샅을 한동안 돌아다녀도 사람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금호 호수 쪽 옛날 종선을 타고 내리던 곳까지 가보려고 했으나, 날은 덥고, 길도 서툴러 포기하고 다시 우수영으로 나왔다.
점심을 먹고 우수영항으로 갔다. 예전에 보던 작은 발동선들은 이제 없고, 거북선 모양의 큰 관광선이 관광객을 부르고 있었다.
우수영항의 거북배
아버지께서 황소를 팔아 이곳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셨다고 하니, 그 말을 들은 뒤로는 눈에 삼삼하게 그날이 그려지는 우수영항이다.
지나치는 길에 쳐다보기만 했는데, 오늘은 뙤약볕아래 서서 울돌목과 서해를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7년전쟁 막바지에 극적인 반전을 이룬 이순신 장군과 이곳 사람들, 그 긍지와 신념으로 자손들을 키우고 살아왔던 우리 조상들, 그 후손 중의 하나이지만, 오늘은 그저 무심한 나그네일 뿐이다.
이제 나는 내 일생 중 가장 오래 살았던 무등산 아래에서 남은 생을 보낼 것이다. 그 어떤 낙원이 또 있을 것인가?
내 가족이 살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는 곳, 그곳이 고향이고 낙원 아니겠는가?
울돌목에 놓여진 다리 건너로 우수영과 별뫼가 보인다
진도타워의 조형물
그런 맘으로 내 조상들이 낙원으로 여기고 살았고, 피땀을 흘려 후손들을 기르고 키웠던 별뫼와 고당리 들녘에 고개를 숙이고 나들이를 마무리했다.
광주로 오는 길 영암금호방조제에 잠깐 들렸다. 내친 김에 방조제 수문에 올라 이제는 호수가 된 금호와 서해, 목포 쪽을 바라보았다.
금호방조제 화단에 하얀 해당화 한 송이가 피어있었다. 문득 그 꽃 한 송이가 산천도 인걸도 변하는 게 세상사임을 새삼 되새기게 하였으니, 살아있음 그 자체가 행복이리라.
* 날도 덥고 하여 목포로 나오는 길에 농업박물관에 잠깐 들렸다. 근무하는 분들이 참 친절하였다. 허나 주차장 매점의 문이 닫혀있어서 생수 한 병 사고자 했으나 사지를 못했다.
농업박물관 안의 장독대
아쉽긴 하지만 정형모가 그린 이순신 장군
장군과 별뫼 마을을 떠나며 시 한 수 남긴다.
명량
으르렁거리니
그날처럼 거친 파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휘몰이 가락이다
네 목숨 하나 살려고
백성과 장병을 버리느냐?
장군의 호령소리 드높고
수군의 기개 백전불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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