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뜨락>
다형 선생을 뵈러 가면서
김 목(남도문학 발행인)
눅눅하고 축축하고 무덥던 여름이 지나가는 가 했더니, 잦은 비가 이어지는 우중충한 가을이다. 흩뿌리는 가을비가 채소농사에는 좋을 거라지만, 티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그립기까지 하던 날이다.
비 개고 나면 하늘은 더 맑고 높아진다 했다. 마침내 손끝으로 슬쩍 건드리면 쨍하고 금이 갈 것 같은 그 가을 하늘이다. 환한 햇살을 받으며 다형 김현승 선생을 뵈러 양림동으로 갔다.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은 다형 시인이 살았던 마을이다. 지금은 고층건물이 앞을 가리지만, 시인이 살았던 무렵의 양림동은 나지막한 집들이 양림산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무등의 해가 솟으면 제일 먼저 붉은 햇살을 받는 곳이었다.
능수버들 숲 이름을 가진 그 양림동 마을 앞 광주천 옛 이름은 대추여울이다. 냇물에 햇살이 부서지며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잘 익은 대춧빛이었으리라. 그 생기 넘치는 여울물은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아낙들의 빨래터였으며, 자갈밭은 빨랫감 차지였다. 건너편은 금동시장이었고, 큰 장날이면 모래밭에 가설무대가 세워져 한바탕 굿판이 벌어졌다.
부스럼이 나면 우리 고장의 종기명약 ‘차고약’을 붙이고, 내복 솔기에 숨은 이를 잡고, 백선증으로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진 아이들의 머리에 백반을 문질러야 했던 시절이다. 신발짝으로 엿을 사먹고, 점심 거르는 것이 먹는 것보다 많던, 그렇게 먹고 살기에 풍족한 때가 아니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잘 살아남았고, 우리들이 그 뒤를 잇고 있다.
그 옛 생각을 반추하며 양림동 골목으로 들어서니 다형다방이 장승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름은 다방이지만, 시인을 기리는 기념관이고 마을의 역사관이었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 시인과 마주하며 옛 인연을 떠올린다.
젊은 시절, 문학에 깊이 심취했을 때다. 해마다 이맘 때, 가을이 깊어 가면 마음이 설레었다. 신춘의 계절이 눈앞이어서다. 그렇게 한 해 동안 썼던 글들을 다시 다듬고 정리해서 신문사 사고가 나기를 기다렸다.
당시 주체하지 못하게 글쓰기에 푹 빠졌던 때라,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시, 동시, 동화, 소설 그리고 극본도 썼다. 소재만 있으면 글로 만들었다. 여기저기 투고해서 낙선 되고, 최종심에 오르고, 추천을 받고, 당선이 되기도 했다.
70년대 초다. 시전문지 창간기념 현상모집에 시 30편을 써서 응모했는데, 최종심에서 떨어진 일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당선작은 작고한 송수권 시인의 ‘산문에 기대어’였다. 동시는 미국으로 떠나 작고한 박남수 시인의 추천을 받았다. 그리고 동화는 안수길, 강신재 선생의 심사로 당선되었다. 다형 시인도 그렇게 해서 뵙게 되었다.
75년이다.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통지를 받았다. 심사하신 분이 다형 시인이었다. 5년여의 열정과 좌절, 노력과 인내의 습작 끝에 얻어낸 소중한 결실들이었다.
하지만, 그 해 75년 4월에 다형 시인은 우리 곁을 떠났고, 77년에는 안수길 선생도 머언 소풍 길로 가셨다. 1994년에는 박남수 시인, 2001년에는 강신재 선생마저도 앞 선 분들의 길로 가셨다.
이제 뒤따라 갈 사람이 누구인가?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러하니 살아있을 때 소중한 길을 열어주고, 가르침을 준 그 분들의 은혜에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고 싶다. 그분들의 전기도 쓰고 싶고, 기념사업에도 동참하고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분들의 숭고한 삶과 문학의 길을 이어받고, 부끄럽지 않은 후학이 되어야 하리라.
시 ‘가을’이 새겨져 있는 양림산의 다형 선생 시비를 향해 가면서 짧지만, 긴 회상으로 가을 어디쯤에서 불어오는 소슬한 바람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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