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취시가와 김덕령 장군

운당 2013. 9. 1. 23:29

취시가와 김덕령 장군

 

그 애비에 그 딸이다. 다까끼 마사오, 오까모도 미노루 시절에 듣던 무시무시한 얘기가, 딸의 힘이 쎄지자 또 세상을 횡행한다.

하든지 말든 지고, 힘쎈자들의 깊은 뜻을 이 힘없는 민초가 뭘 알까만, 그래도 세상이 하 수상하다.

그래서 오늘은 임진왜란의 의병장으로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36세의 나이에 운명하신 김덕령 장군을 만나러 무등엘 갔다.

 

그러다 권필(權韠)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1569(선조2) 서울에서 권벽(權擘)7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마흔세 해 째인 1612(광해군 4), 그때나 지금이나 쓰잘데기 없는 세상 소풍 마치셨다.

본관은 안동,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로 송강 정철의 제자였지만, 벼슬보다 시주(詩酒)를 즐기며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추천되었으나 예조(禮曹)에 인사를 드리라는 말에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의심과 질투 많은 머저리 임금 선조 25(1592)에 임진왜란이 오자, 강경한 주전론을 펼쳤다. 국왕의 의주 피난을 놓고 의견이 분분할 때 국왕을 잘 보필하지 못한 이산해, 유성룡 등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또 선조의 둘째 아들 광해군(1608~1623)의 비() 유씨(柳氏) 척족(戚族)들의 방종을 궁류시(宮柳詩)로 풍자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시가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에서 발견되어 친국(親鞠)을 받고 죽음의 문턱에서 유배형으로 낙착되었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광해군 3(1611) 진사(進士) 임숙영이 책문시(策問試) 과거시험지에 권세가의 전횡(專橫)을 비난하는 글을 썼다. 광해군이 이걸 알고 두 눈에 쌍심지,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임숙영을 낙방시키라고 했다. 그러나 대신(大臣)들이 낙방은 온당치 않다하여 그해 여름이 다가도록 합격자를 발표하지 못하다 가을에야 비로소 그대로 발표하라는 허락을 받았다.

바로 이 일이 더러운 시대엔 과거를 보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진 권필의 비위를 건드려 칠언절구시(七言絶句詩) 한 편이 나왔다. 바로 권필을 죽음으로 몰고 간 궁류시(宮柳時)’.

 

宮柳靑靑鶯亂飛(궁류청청앵란비)

滿城冠盖媚春暉(만성관개미춘휘)

朝家共賀昇平樂(조가공하승평락)

誰言危遣出布衣(수견위언출포의)

궁안 버들은 푸르고 꽃잎은 어지러이 흩날리는데

성안은 고관들의 수레로 가득 하고, 봄빛에 아첨을 떠네

조정의 대신들 앞 다투어 태평과 안락을 축하하니

누가 바르고 위험한 말을 한갓 포의(布衣)에게서 나오게 했나.

 

관개(冠盖)는 벼슬아치를 가리키고, 궁류(宮柳)는 광해군의 비() 유씨(柳氏)의 남동생 유희분(柳希奮)이다. 포의(布衣)는 임숙영이다.

광해군이 또 분노하여 지은이를 찾던 중에 조수륜의 집에서 이 시가 나온 것이다. 권필은 조정에 직언(直言)하는 신하가 없으므로 이 시로 간신들을 풍자한 것이라고 자백했다.

광해군이 처형하려하자, 당시 좌의정인 오성 이항복이 울면서 강력히 간언하여 권필은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그렇게 혹독한 고문의 친국을 받은 뒤 들것에 실려 귀양처로 갈 때다. 동대문 밖에서 지인들이 주는 이별주를 폭음하고 이튿날 운명했으니, 풍류기인다운 죽음을 택한 셈이다.

 

1601(선조 34)에 대문장가인 명나라 사신 고천준이 조선에 왔을 때다. 권필 선생은 원접사(遠接使)인 월사 이정구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강화(江華)에 머무르며 많은 유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권필 선생은 글의 재주보다는 글속에 진실 된 면모가 담겨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 정신으로 당대의 모순과 부패상을 현실 그대로 비판하고 사실주의적인 문학관을 가졌던 그는 1623년 인조반정 뒤,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고 석주집과 한문소설 주생전(周生傳)을 남겼다.

 

권필의 한문소설 주생전의 내용은 이렇다.

촉나라 주생의 조상 대대로 전당 땅에서 살았으나, 아버지의 벼슬로 촉에서 산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통하고 열여덟에 태학생이 되어 주위의 부러움을 샀으나 번번이 과거에 떨어지자 인생이 무상한데 어찌 과거에 의해 공명에 매이겠는가하고는 장사를 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옛 고향 전당에서 노닐던 중, 옛 여자 친구 배도를 만난다. 기생이 된 배도는 아름답고 재주도 많았으며, 이들의 우정은 곧 사랑으로 바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생은 과부 승상 집에 갔다가 승상의 딸 선화를 본 뒤 그리워한다. 배도의 소개로 승상집 아들 국영의 선생이 되어 선화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

어느 날 승상 부인이 딸과 주생의 관계를 의심하여, 다그쳐 사실을 듣는다. 이에 선화는 병이 나고, 국영이 병으로 죽는다.

배도가 주생에게 선화와 결혼하고, 자신을 주생이 다니는 길가에 묻어 달라며 죽는다.

실의에 빠진 주생은 인생무상을 느끼며 배도를 묻고 정처 없이 방랑하다가 친척의 도움으로 선화와 결혼한다.

조선에 왜적이 쳐들어와 원군으로 참전하였다가 병이 난 주생을 내가(권필) 송경의 역관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불의에 맞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권필 선생! 참으로 멋지고 대단한 분이다.

역사에 이런 멋진 분들이 몇 분 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던 생육신으로 대문장가인 김시습(金時習, 1435~ 1493) 선생 역시 임금 따위는 뜬구름으로 여긴 멋진 분이다.

또 권필 선생과 동갑내기로 절친한 벗이었던 허균(許筠) 선생이 6년 뒤인 1618826, 서울의 서쪽 저자거리에서 반역죄로 참수형을 당했으나, 역시 대궐에다 대고 오줌이라도 갈길 멋진 분이다.

그리고 더 세월이 흘러 삿갓 선생 김병연(金炳淵1807~1863)에 이르면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작금에 선거판에서 따먹은 벼슬이라며 거들먹거리고 있는 종자들이 다 방중개존물(房中皆尊物)들일 뿐이다.

 

이렇게 왕보다 몇 수 위였던 권필 선생의 꿈에 김덕령 장군이 술에 취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시 한수를 읊었다. 바로 취시가(醉時歌).

 

醉時歌, 此曲無人聞 취시가, 차곡무인문

我不要醉花月, 我不要樹功勳 아불요취화월, 아불요수공훈

樹功勳 也是浮雲, 醉花月也是浮雲, 수공훈야시부운, 취화월야시부운

醉時歌, 無人知我心, 只願長劍奉明君 취시가, 무인지아심, 지원장검봉명군

 

취시가여, 이 노래 듣는 사람 없네

나는 꽃과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공훈도 세우고 싶지 않네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 구름이요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 구름이라네

취시가를 알아주는 사람 없네

내 마음 장검 들고 명군을 받들고 싶네.

 

취시가(醉時歌) 한 수 말하려 오랫동안 권필 선생을 붙들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김덕령 장군이 장검 들고 받들고 싶은 명군이 어디 있을까? 고양이 이마에 뿔이 나는 것을 차라리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쥐나 닭이 설치고, 설레발치는 종자들만 득시글거리는 세상이라 권필 선생만 지루하게 만들었다.

누구 읽으라고, 봐주라고 쓰는 글 아니다. 이제 권필 선생 흉내로 취시가와 궁류시를 섞어 한수 읊으며 지루한 글 매듭짓고자 한다.

 

 

술에 취하는 줄 알았는데

꽃에라도 취하는 줄 알았는데

부녀가 이어 쓰는 돈섬의 추억이라 막대기 글씨에 취하고

암수 구별 없이 다투어 붙이는 폐계 벼슬에 취한다

바르고 옳은 말은 견격(犬格)이라

귀신이 장롱속에 돈을 갖다 놓는 세상

투기군 거간꾼을 왕후장상(王侯將相)이라 부른다.

뼈로 항아리를 만들고 피로 술을 빚어

꿈속에라도 마실 수 있으려나

취하여 부르는 노래여!

 

<김덕령 장군 생가>

<임진왜란을 지켜봤을 김덕령 장군 생가 앞 냇가의 왕버들나무>

<생가 표지석>

<생가에서 바라본 무등산>

<충장사>

<취가정>

 

    <취가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