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민화

청계귀신

운당 2015. 12. 27. 07:25



무당산 아래 새파랗게 젊은 김 선비가 살았습니다.

고을에서 치르는 과거에는 합격했지만, 성균관에는 들어가지 못해 아직 생원일 때의 일입니다.

김 선비, 그러니까 젊은 김 생원은 너무 가난했습니다.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 굶기를 밥 먹듯 했습니다.

그래도 글공부만은 그만 둘 수 없어 밤을 낮 삼아 달빛과 별빛, 반디불빛, 겨울에는 하얀 눈빛을 빌려 책을 읽었습니다.

과거를 치를 공부만으로는 안 되겠다. 밥을 먹는 공부도 하자.”

김 생원은 천문, 의술, 풍수 등 닥치는 대로 공부를 했습니다.

누구에게 특별히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틈나는 대로 고을의 헌책방을 뒤졌습니다. 돈이 없어 책을 살 수가 없으니, 앉은 자리에서 뚝딱 책을 읽곤 했습니다. 그렇게 책을 읽어 스스로 세상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책을 한 번만 읽으면 술술 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두 번 읽을 필요도 없이 읽은 책은 김 생원의 머리로 쏙쏙 들어갔습니다.

 

그런 뒤부터 김 생원은 사람들 병을 치료해주는 의사도 되고, 죽은 사람 묘 터를 잡아주는 지관도 되었습니다.

병을 치료해주고 약간의 곡식을 받고, 묘 터를 잡아주고, 푼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과거공부만 하던 때보다 먹고 살기가 차츰 나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밤입니다.

그 한 밤 중에 이웃 고을에서 김 생원을 찾아왔습니다. 아이 하나가 갑자기 아파서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횃불을 밝혀 김 생원은 빠른 걸음으로 이웃 고을로 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 하나가 백지장처럼 하얗게 되어 거의 다 죽어있었습니다. 온 몸이 얼음장처럼 차디찼습니다.

낮에까지 잘 놀았던 아이가 갑자기 쓰러지며 저리 되었습니다.”

김 생원이 맥을 짚어보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음식이나, 바람에 의해 생긴 병이 아니었습니다.

해바라기 기름을 가져오시오.”

김 생원이 해바라기 기름을 등에 부어 불을 켜고 아이의 머리맡을 보았습니다.

청계귀신이었습니다. 그 청계귀신이 아이의 목을 타고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청계귀신은 사람에게 달라붙어 병을 앓게 하여 죽이는 악귀입니다. 인간으로 살 때 못된 짓을 일삼다가 죽은 뒤에도 저승으로 가지 않고 인간세계를 떠도는 떠돌이 귀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승에서도 일 년에 한 번 특별이 저승사자를 인간세계로 보냅니다. 저승으로 오지 않고 인간세계에 숨어 사는 떠돌이 귀신 청계귀신을 잡아가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 악귀인 못된 청계귀신이 아이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푸라기를 가져오시오.”

김 생원은 볏짚을 가져오라하여 샘물로 깨끗이 씻었습니다. 그런 다음 청계귀신의 몸뚱이처럼 허수아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허수아비를 들고 마당으로 나가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기 악귀 청계귀신이 있소. 내 저승으로 보낼 테니 받아주시오.”

김 생원은 부싯돌로 불을 일으켰습니다. 그 지푸라기로 만든 허수아비에 불을 붙였습니다. 활활 타는 허수아비를 공중으로 휙 던졌습니다.

그러자 한 줄기 바람이 불더니 그 허수아비를 하늘 높이 잡아채갔습니다.

으아악!”

아이의 목을 누르고 있던 청계귀신의 비명 소리도 들렸습니다. 지푸라기로 만든 허수아비와 함께 청계귀신도 하늘로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깊은 숨을 뱉어내더니 언제 아팠냐는 듯 사방을 휘둘러보았습니다.

물 한 그릇 주세요.”

물을 벌컥벌컥 맛있게 마시더니 엄마 품에 안겼습니다.

이제 다 나았소. 다시는 나쁜 악귀인 청계가 달라붙지 못할 것이오.”

김 생원님! 아니 하늘님! 이 은혜를 어찌 갚으리오.”

아이의 부모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김 생원에게 고마워했습니다.

하늘님이라니요? 당치 않은 소리요. 이 아이와 제기 인연이 깊어 서로 도운 거요. 나는 덕분에 청계귀신을 잡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건 이 아이의 덕이오.”

김 생원은 청계귀신을 물리치는 방법을 책에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대로 실제로 청계귀신을 물리치니 너무 기뻤습니다.

제가 가진 것이 없어 이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대신 진기한 물건을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산밭에서 얻은 물건입니다.”

그 날 이상한 일이 있었답니다. 대낮인데도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별똥별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집 뒤 산밭에 떨어졌다 합니다. 어찌나 소리가 크던지 귀가 먹먹했고, 땅이 흔들려 집이 무너지는 줄 알았답니다.

한참 뒤 정신을 차려 산밭에 가보니 이상한 쇠붙이가 있었답니다.

이게 그거지요. 하늘에서 내려온 귀한 물건이라 생각하고 간직했지요. 이거라도 드릴 테니 부디 받아주시오.”

아이의 아버지는 간절히 마음으로 김 생원에게 산밭에서 얻은 쇠붙이를 주었습니다.

고맙소이다. 이 쇠붙이는 운석이라 하오. 솜씨 좋은 대장장이를 만나 칼로 벼리면 자르지 못하는 게 없을 정도로 훌륭한 명검이 된다오. 또한 청계귀신을 잡는 칼로는 이만한 물건이 없다하였소. 앞으로 이 운석이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을 테니, 감사히 받겠소.”

김 생원은 어릴 적부터 친구로 지내는 대장장이의 얼굴이 떠올라 그 운석을 공손히 받았습니다. 칼로 벼리어 품에 안고 다니면서 청계귀신을 잡을 생각이었습니다.

김 생원은 얼마 뒤 대장장이 친구로부터 칼 한 자루를 받았습니다. 지난 번 이웃 고을에서 얻어온 운석으로 만든 칼이었습니다.

이보게. 내 그동안 수백 자루의 칼을 만들었지만, 이처럼 좋은 쇠로 칼을 만든 것은 처음이네. 천하의 명검이니 잘 간직하게.”

쇠를 알아보는 대장장이인지라, 운석으로 칼을 만들 수 있어서 참으로 기쁘다고 했습니다.

손잡이에 용과 호랑이까지 새겨 넣은 운석으로 만든 칼은 보기에도 좋았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김 생원은 여전히 김 생원이었습니다. 작은 고을의 벼슬자리도 얻지 못하고, 그냥 생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김 생원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습니다.

특히 청계귀신을 잡는 영험한 명의로 백성들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음식이나 바람으로 생긴 병은 다른 의사들도 치료할 줄 알았으나, 악귀인 청계귀신이 달라붙어 생긴 병은 김 생원 아니면 안 되었습니다.

그럴 즈음입니다.

김 생원이 지리산 아래 큰 고을에 갔을 때입니다.

원님의 아들이 갑작스런 병에 걸려 살아있어도 죽은 몸이라 했습니다.

김 생원은 재촉하는 심부름꾼을 따라 한달음에 달려가 원님 아들의 맥을 짚었습니다.

역시나 음식이나 바람에 의해 생긴 병이 아니었습니다.

김 생원은 사람들은 물리치고 해바라기 기름으로 불을 켰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청계귀신이 달라붙어 원님 아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네 이 못된 악귀 청계야! 오늘로서 네 악행은 끝이다. 내가 누군 줄 아느냐?”

김 생원이 가슴에서 운석으로 만든 칼을 꺼냈습니다.

악귀 청계가 운석 칼을 보더니 부르르 떨었습니다.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어림없다.”

김 생원이 빠른 솜씨로 운석 칼을 휘둘러 청계귀신의 몸을 갈랐습니다.

으키키익!”

듣기에도 소름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청계귀신은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곧장 저승의 청계지옥으로 가는 소리였습니다. 운석 칼이 갖고 있는 영험한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아휴! 시원하다.”

원님 아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원님은 물론 고을 백성들이 만세를 부르며 좋아했습니다.

 

분명 어딘가에 청계귀신들이 떼거리로 모여 있을 거야. 그 장소만 알면 한꺼번에 처치를 하는 건데.”

원님 아들을 살린 김 생원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섬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어디 자고 갈만한 집이 없을까? 하고 사방을 둘러보는데 산 아래 기와집이 한 채 있었습니다.

김 생원은 서둘러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었습니다. 밤은 깊어 하는 수 없이 김 생원은 방 한쪽을 쓸고 잠을 청했습니다.

한 밤중이 되었습니다.

다그락, 다그락!’

어디서 자갈이 강물에 쓸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깜짝 놀라 찢어진 문틈으로 밖을 엿보니, 커다란 구렁이였습니다. 가늠해보니 길이가 10m도 더되었습니다.

세상에 저토록 큰 구렁이가 있다니.”

놀란 눈으로 보고 있는데, 이번엔 더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큰 구렁이가 재주를 풀쩍 넘더니 인간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저런, 저런! 구렁이가 오래 되어 인간이 되었구나. 필시 또 저 인간이 청계귀신이 되겠지.’

김 생원이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인간으로 변한 구렁이가 입 안에서 무엇을 자꾸만 토해냈습니다.

놀랍게도 인간이 된 구렁이가 토해낸 것은 금덩이, 은덩이, 다이아몬드, 진주, 사파이어, 비취, 오팔 같은 귀하고 값진 보석이었습니다.

그래서 구렁이가 담을 넘을 때 자갈이 강물에 쓸리는 소리가 났구나. 저 보석들이 땅에 쓸리는 소리였어.’

김 생원이 그리 생각할 때입니다.

내 보물, 내 보석, 날마다 불어나니 너무 좋구나. 내 배에 이 보석이 가득 차면 난 귀왕이 되는 거야. 귀왕이 되면 귀신들은 물론 인간들을 거느리고 사는 거야. 흐흐흣! 어서 빨리 그날을 만들자.”

인간이 된 구렁이는 한동안 입에서 뱉어낸 보석을 끌어안고 혼잣소리를 하더니, 어느덧 잠에 곯아떨어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입니다.

인간이 된 구렁이는 어제 입에서 뱉어냈던 보석을 다시 집어삼켰습니다. 그러더니 재주를 풀쩍 넘어 구렁이가 되었습니다. 이어 자갈이 물에 쓸리는 소리를 내며 담을 넘어 어디론 가로 가버렸습니다.

옳지. 오늘 밤에는 내가 널 없애버리겠다.’

김 생원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하루 밤을 더 그 집에서 묵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운석으로 만든 칼을 꺼내 어젯밤 구렁이가 넘어온 담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구렁이가 담을 넘던 자리를 찾았습니다. 그 곳 담 위에 칼을 거꾸로 깊숙이 꽂아 끝만 나오게 했습니다.

 

그날 밤입니다.

한밤중이 되었습니다. 이윽고 또 다그락, 다그락!’자갈이 강물에 쓸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김 생원은 찢어진 문틈으로 밖을 엿보았습니다.

생각한 대로였습니다. 구렁이가 어제 넘어온 그 자리로 담을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담을 다 넘어온 구렁이가 세상이 찢어지는 듯 괴성을 지르며 온 몸을 뒤틀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대로 죽어버렸습니다.

운석으로 만든 칼이 구렁이의 배를 두 쪽으로 갈라버린 것입니다.

코를 어디 두를 데 없이 악취가 온 집안에 퍼졌습니다.

김 생원은 거기까지 보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입니다.

죽어버린 구렁이 주변에는 온갖 보석이 산더미였습니다.

김 생원이 집 안을 뒤져보니 다행히 새끼를 꼬아 만든 쌀가마니가 있었습니다. 보석이 쌀가마니 가득 담겼습니다. 혼자서 짊어지기엔 너무 무거웠습니다.

김 생원이 아래 고을에 가보니 소달구지가 있었습니다. 김 생원은 값을 치르고 소달구지를 산 뒤에 보석 가마니를 싣고 무당산 고을로 돌아왔습니다.

 

친구! 자네가 만들어 준 운석 칼이 큰 일을 했네. 아무 말 묻지 말고 받게나.”

김 생원은 보석을 한 줌 대장장이에게 주었습니다. 산밭에서 얻은 운석을 김 생원에게 주었던 이웃 고을 사람에게도 보석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김 생원은 그렇게 보석을 조금씩 나누어 불쌍한 백성을 돕는 일에 썼습니다.

그때부터 다시 과거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한양 고을에 가서 임금님 앞에서 치르는 과거에도 급제를 했습니다.

하지만 성균관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살았습니다.

운석으로 만든 칼을 가지고 청계귀신을 쫓는 일을 제일 많이 하며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이 시대의 민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금과 똥  (0) 2015.12.29
인간  (0) 2015.12.23
바다  (0) 2015.12.21
하늘  (0) 2015.12.18
  (0) 2015.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