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 해질녘입니다.
한 젊은이가 바닷가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주막집에 들어가 따뜻한 국밥을 시켜놓고 말없이 후르륵, 후르륵 먹었습니다.
“배가 고팠나 보구려. 국물을 더 좀 주리다.”
마음씨 좋은 주모 아주머니가 국밥 그릇에 국물을 한 국자 더 부어주었습니다. 돼지고기가 둥둥 떠 있는 기름진 국물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바닷바람이 추운 때라 파랗게 얼어있던 젊은이의 얼굴이 발갛게 되었습니다. 따뜻한 국밥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낯선 젊은이는 무슨 일로 이곳 바닷가 마을에 왔소?”
“예! 저는 동서남북을 둘러봐도 들녘뿐인 곳에서 살았지요.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그 들녘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깊은 회의가 들었지요. 왜 우린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살며 죽어선 저 들녘에 묻혀야 하는가? 하고 말이지요. 그러다 바다 이야기를 들었지요. 아! 나는 바다에서 살다 바다에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농토를 팔아 이곳으로 왔지요.”
그 때 주막집 한 쪽에서 젊은이의 말을 엿듣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거짓말과 사기를 잘 치는 사기꾼이어서 사람들이 상대하기 두려워하는 이 첨지였습니다. 자기 뜻에 조금만 맞지 않아도 트집을 잡아 시비를 걸고 못된 짓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기에 모두가 두려워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못된 병을 앓게 한다는 청계귀신이 그 이 첨지의 별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에 대놓고 이 첨지를 청계귀신이라고는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 이 첨지, 청계귀신이 젊은이 옆으로 왔습니다.
“젊은이! 나하고 막걸리 한 잔 하세나. 이곳 바다로 살러왔다고? 그렇담 날 만난 건 행운이네. 암, 그렇고말고. 이 바닷가 마을에선 내가 나서야 무슨 일이든 다 된다네. 흐흐흐!”
청계귀신은 의자 한 쪽에 놓인 보따리를 흘끔흘끔 곁눈질하며 이상한 표정으로 웃음을 실실 흘리며 말을 걸었습니다.
‘아이고 저 화상! 청계귀신은 어떤 귀신이 잡아갈까?’
주모가 혀를 끌끌 찼습니다. 혹시라도 젊은이가 어떤 봉변을 당할까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럽시다. 주모! 막걸리 한 주전자 주세요.”
그렇게 해서 젊은이와 이 첨지는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어느 정도 마시니 둘 다 취했습니다.
“자! 오늘 내 집에 가서 자세나.”
어느덧 어둑어둑 날이 깊어 젊은이는 이 첨지 집으로 갔습니다.
이 첨지 집은 바다가 시작하는 너른 갯벌을 내려다보는 곳이었습니다.
“젊은이! 그러니까 바다에서 살고 싶어서 왔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물론 돈을 준비해왔겠지?”
“그렇습니다.”
“좋아. 그렇담 보게나. 바다에 살려면 우리 집만 한 곳이 없네. 자네가 살던 들녘도 넓었겠지만, 이 갯벌을 한 번 보게나. 썰물이 되면 끝없이 펼쳐진 갯벌이요, 밀물이 되면 넘실대는 바다가 바로 우리 집 안마당일세. 그리고 보게나. 저 갯벌에 있는 게며, 조개 등이 다 내 것이네. 그것뿐인가? 갯벌에 물이 들면 오리가 또 수십만, 아니 수백만, 수천만마리가 오네. 그 오리들이 또 다 내 것일세. 그러니 난 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인 셈이네. 어떤가? 이 집과 저 갯벌을 사지 않으려나?”
발그레 물든 노을 아래 마침 물이 들 때였습니다. 찰랑찰랑 파도소리와 함께 너른 갯벌을 물이 덮자, 이번엔 오리 떼가 시커멓게 날아와 물 위를 덮었습니다.
마침 둥실 뜬 보름달이 바다를 비추었습니다.
이제 잔잔해진 바다와 그 위를 새카맣게 덮은 오리 떼, 마치 그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요, 꿈속의 광경만 같았습니다.
“이 첨지님! 그러니까 이 집과 갯벌을 제게 파시겠다고요?”
“그렇다니까. 어디 돈 보따리나 풀어보게.”
젊은이는 등에 짊어진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보따리에서 돈이 가득 나왔습니다.
“좋아. 그 정도면 이 집과 저 갯벌의 게며, 조개, 오리까지 모두 살 수 있겠네. 으흠! 하지만 알아야 하네. 내 젊은이가 맘에 들어 싸게 주는 거니까.”
그렇게 해서 다음 날 아침엔 이 첨지 집이 젊은이 집이 되었습니다. 물론 젊은이가 가지고 온 돈 보따리는 이 첨지 것이 되었습니다.
다음 해 봄입니다.
젊은이는 바닷가 갯벌 앞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봤습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왜냐하면 젊은이가 할 줄 아는 거라곤 농사를 짓는 거였습니다. 그러니 갯벌에 있는 게며 조개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잡을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또 그 많던 오리 떼도 봄이 되자, 다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었습니다. 젊은이는 갯벌이 시작되는 갯가에 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논밭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낮은 곳은 논을 만들고, 비탈진 언덕 쪽은 밭을 만들었습니다.
한 해, 두 해 논이 늘어나고 밭도 늘어났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장가도 들었습니다. 아들, 딸도 낳았습니다.
농사는 정말 잘 되었습니다. 늦가을이면 날아온 오리 떼들이 논밭에 똥을 쌌습니다. 그 오리 똥이 땅을 기름지게 했습니다.
해마다 논밭의 곡식은 풍년이었습니다.
어느덧 젊은이는 노인이 되었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저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니며 장사를 하고 싶습니다. 날마다 바다만 바라보고 살기가 싫습니다.”
노인의 아들이 아버지를 졸랐습니다.
“그래라. 어차피 내 모든 것은 네 것이니 네 맘대로 하렴.”
노인은 그동안 모은 재산을 모두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배를 타고 나가 세상 구경도 하고 장사도 하고 그러겠습니다.”
노인의 아들은 먼저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물건을 잔뜩 싣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여기저기 항구를 다니며 가지고 간 물건을 팔고, 그곳에 있는 물건을 샀습니다.
장사는 잘 되었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노인의 아들은 배를 더 만들었습니다. 물건도 더 많이 실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도 더 걸리는 머언 항구까지 오가며 장사를 했습니다.
어느덧 노인의 아들도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 어느 해입니다.
바다로 나간 노인의 배가 항구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한 달, 두 달을 기다렸지만, 한 척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노인의 배를 모두 빼앗아갔다고 했습니다.
노인의 장삿배는 전쟁을 하는 배가 되었고, 그만 대포를 맞아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했습니다.
겨우 한 척만 도망을 쳤는데, 그마져도 거센 풍랑을 만나 거의 다 부서져버려서 이웃나라 항구에 있다고 했습니다. 어렵사리 다른 배를 얻어 타고 돌아온 선원들에게 노인이 들은 것은 그 이야기뿐이었습니다. 배도 물건도, 돈도 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노인에게 남은 건 갯가를 막아 일군 논밭과 갯벌뿐이었습니다.
“아버지! 주막집을 하고 싶어요. 요즈음 우리 갯벌의 오리 떼를 보러 사람들이 많이 오지요. 그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잠자리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주막집을 하고 싶어요.”
어느 날 노인의 아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네 맘대로 하렴. 어차피 내 모든 것은 네 것이니, 이제 네 하고 싶은 대로 하렴.”
노인은 아들에게 남아있는 재산을 모두 물려주었습니다.
노인의 아들은 갯벌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주막집을 지었습니다. 사람들이 쉬고 자는 방에는 널따란 유리문을 달았습니다. 바다와 갯벌이 잘 보이게 했습니다.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에는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출 수 있는 방을 만들었습니다.
‘바다와 친구가 되는 집’
주막집 이름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처음에는 늦가을부터 봄까지 왔는데, 차츰 차츰 계절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봄이면 끝없이 펼쳐진 갯가 논밭에는 유채꽃이 아름다웠습니다. 또 푸른 보리가 파도처럼 출렁였습니다. 여름에는 갯벌에서 게도 잡고 조개도 줍고, 물놀이도 할 수 있었습니다. 가을이면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 또 보드를 타고 갯가를 신나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겨울이면 하늘을 시커멓게 덮고 춤을 추는 오리 떼의 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막집을 연 노인의 아들은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노인의 아들도 다시 노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노인에게도 젊은 아들이 있습니다. 그 아들이 무엇을 하고 싶다고 할지 아직은 모릅니다.
혹시 바다는 알려는지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