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엔 나이 60은 노인도 아닙니다. 예전에는 61살이면 회갑잔치를 하고 아주 오래 산 노인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나이로는 노인이라고 말하기가 조금 쑥스럽다는 말입니다.
어쨌거나 김 노인은 나이 60이 되었습니다. 이제 내년이면 회갑인데 예전처럼 회갑잔치를 하지 않을 거라 합니다.
“우린 늙은이도 아니고 젊은이도 아니야.”
김 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60이라는 것 때문에 평생 일했던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젊은이들처럼 일할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 노인은 아침밥을 먹으면 집을 나옵니다. 딱히 무슨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평생을 아침이면 집에서 나오고, 해질녘이면 집으로 들어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 둔 뒤에도 아침이면 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집에서 나와도 할 일이 없습니다. 갈 곳도 없습니다.
그래서 버스 정류장으로 갑니다. 무조건 아무 곳이나 골라 표를 끊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갑니다.
이곳저곳 낯선 곳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배가 고프면 준비해온 점심을 먹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해를 쳐다보고 시간을 잰 다음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옵니다.
갈 때와 반대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김 노인을 낯선 고을에 도착했습니다. 여느 때처럼 여기 저기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점심 무렵에 어느 으슥한 산골에 이르렀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시커먼 구름이 몰려와 해를 가리더니, 세찬 바람까지 불었습니다.
급기야 세찬 바람에 실려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거 어쩌지?’
사방을 둘러봐도 비를 피할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저만큼 외딴 집 한 채가 보였습니다.
김 노인은 급한 김에 걸음을 빨리해 그 외딴집 처마 밑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습니다. 그 때입니다. 그 외딴집에서 구슬피 우는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람소리, 빗소리에 섞여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는데, 귀를 기울여보니 여자의 울음소리였습니다.
‘이상한 일이다.’
김 노인은 조심스레 대문을 열고 집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짐작한 대로였습니다. 집 안에 한 여인이 보이고 구슬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비를 만나 잠시 피하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구슬프게 우는 소리가 들려 염치불구하고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여인은 김 노인을 보고도 한동안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울음소리가 너무도 구슬픈지라, 김 노인도 금세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으면 도와드리지요.”
김 노인은 울고 있는 여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말했습니다.
“오랜 병을 앓던 제 딸아이가 죽었답니다. 그래 오늘 산에 묻어주려 했는데 이렇게 비가 쏟아져서 울고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묻어주기로 하지요. 허락만 하시면 제가 도와드리지요.”
“그래주신다면 너무도 고맙지요.”
김 노인과 구슬프게 울던 여인이 그런 얘기를 나누는 데 마침 비가 갰습니다.
“우리 집 뒤로 난 길을 올라가시면 소나무 두 그루가 있지요. 그곳에 이 아이의 아버지 묘가 있답니다. 이 아일 그곳에 묻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럼 염치없지만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황망 중에 대접할 것도 없으니, 저는 아랫마을에 가서 술과 음식을 좀 구해오겠습니다.”
“그리하십시오. 딸 아이는 제가 잘 묻어주지요.”
그렇게 해서 구슬프게 울던 여인은 술과 음식을 구하러 아랫마을로 가고 김 노인은 죽은 여자애 시체를 메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김 노인이 시체를 잘 묻어주고 집으로 내려오니, 구슬피 울던 여인은 보이지 않고 안 방에 음식상이 걸게 차려져 있었습니다. 음식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어서 방금 차려놓은 음식상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구슬피 울던 여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보시오. 어디 계시오. 딸 아이는 잘 묻어주고 왔소이다.”
김 노인이 구슬피 울던 여인을 찾았지만, 여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김 노인은 우선 음식을 먹었습니다. 술도 한 잔 했습니다. 그러면서 술잔을 살펴보니 금 술잔이었습니다. 금 술잔에 새겨진 그림도 보통 솜씨가 아니었습니다. 쉽게 볼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아무튼 김 노인이 아무리 기다려도 구슬피 울던 여인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김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집을 나왔습니다.
어두워진 길을 걸어 아랫마을까지 왔습니다.
어느 집 앞을 지나치는 데 집안이 두런두런 시끄러웠습니다.
“제사를 지낼 음식과 술동이는 어디로 갔으며 금 술잔은 또 어디로 갔단 말이냐?”
큰 소리로 들려오는 금 술잔을 찾는 소리에 김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그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혹시 금 술잔에 새겨진 그림이 봉황이 아니오?”
“그렇소. 오늘은 우리 아버님 제삿날이요. 그래서 우리 5대조 할아버지께서 임금님으로부터 하사받은 귀한 금 술잔을 꺼냈소.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 금 술잔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렸소. 제사상의 음식과 술동이도 함께 사라져버렸지요.”
그 집 주인이 말을 들은 김 노인은 낮에 윗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윗마을에는 빈집이 하나 있을 뿐이지요. 그렇지요. 몇 해 전 그 집 딸이 청계귀신에 씌워 병을 앓다가 죽었지요.”
“아무튼 제가 오늘 그 집 딸 아이를 묻어주고 술과 따뜻한 음식을 얻어먹고 왔지요. 그리고 술잔이 금 술잔이었소. 그러니 그 금 술잔을 찾으시려면 그 집에 가봅시다.”
그렇게 되어 김 노인과 아랫마을 제삿집 사람들이 윗마을로 갔습니다. 다 쓰러진 집 안방에는 김 노인이 먹던 음식과 술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술동이와 금 술잔도 있었습니다.
“맞소. 이 금 술잔이며 술동이가 다 우리 것이오. 어찌하여 이 곳에 있단 말이오?”
아랫마을 제삿집 사람들도 놀랐지만 김 노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날 그렇게 너무도 이상한 일을 겪었지만, 김 노인은 그 때부터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을 깨끗이 닦아주고 저승 갈 때 입는 옷을 입혀줍니다. 그것을 염습이라고 합니다.
“이제 앞으로 할 일을 정했다. 죽은 사람의 염습을 해주는 일을 하자.”
김 노인은 다음 날 봉사단체를 찾아갔습니다. 죽은 사람의 염습을 해주는 봉사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김 노인은 죽은 사람의 염습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습니다. 염습 일을 늦게 배우고 시작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일을 잘했습니다.
고통 속에 죽은 사람도 김 노인의 염습을 받으면 평화롭고 행복한 얼굴이 되었습니다.
또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그날은 어느 항구도시의 봉사단체에서 김 노인을 불렀습니다. 그만큼 김 노인의 염습 솜씨는 여러 고을에 소문이 났습니다.
김 노인은 그 항구도시에서 부탁받은 염습을 모두 마쳤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남아 구경을 나섰습니다.
저 멀리 너른 바다에는 커다란 배가 떠있습니다. 가까운 곳에는 작은 배들이 부지런히 다닙니다.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여객선도 있고, 고깃배도 있습니다.
김 노인은 급할 것도 없는 걸음으로 천천히 바닷가 구경을 마치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쪽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때입니다.
“참 멍청한 게 인간이야.”
“그러게 말야. 인간들이 우리 보고 멍청하다고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야.”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하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키가 멀쑥하게 큰 감나무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감나무 너머로 허름한 기와집이 반쯤 열린 대문 틈으로 보였습니다. 허름하긴 했지만, 지붕은 팔작지붕이요, 열두 칸 겹집이었습니다. 용마루 뒤로 우거진 숲은 대숲이었습니다.
‘아! 예전엔 만석지기 부잣집이었겠구나.’
김 노인이 그리 생각할 때 또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흐으! 이런 좋은 집을 귀신집이라고 내버려두고 있으니 말야.”
“그러게. 귀신이 바로 황금덩어리인데 말야.”
“그러니 인간이 우리 보다 멍청하다는 거 아냐? 안 그래?”
“그렇고말고. 멍청한 건 좋은데, 우리 보고 멍청하다고 하니 우스워서 그러지.”
김 노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재잘재잘 말을 하는 게 바로 감나무 가지의 참새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참새가 말을 하고, 그 말을 내가 알아듣다니?’
김 노인은 혹시 내가 미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혹시 꿈을 꾸는 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차려준 음식과 술도 마신 적이 있는 김 노인입니다. 그래서 크게 당황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애! 멍청한 인간들 얘긴 그만하자.”
“그래, 이 좋은 황금덩어리 집을 귀신 나오는 집이라고 하는 그 멍청한 인간들 얘기 그만하자.”
“그런데 인간들이 저 대숲에 있는 황금덩어리가 귀신인줄 안다면 놀라 기절할 거야.”
“그렇지, 그 황금덩어리를 가지면 큰 부자가 될 텐데.”
“에이! 인간들은 바보 멍청이야. 그러니 그 얘기 그만하자니까.”
“그래! 배도 슬슬 고프니 밥 먹으러 가자.”
“응!”
신나게 떠벌이던 참새 두 마리가 후르륵 날아가 버렸습니다.
김 노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참새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눈앞의 허물어져 가는 집에 대한 궁금증이 컸습니다.
김 노인은 배고픈 것도 잊고 가까운 중개인사무소로 갔습니다.
“혹시 저 위쪽에 있는 열두 칸 기와집을 아오?”
“아! 그 귀신 집말이오. 그 집은 살던 사람들이 모두 귀신 때문에 죽은 집이오. 누구든 그 집만 들어가면 사흘을 못 넘기고 죽소. 그래서 지금 흉가로 버려져 있는 집이오.”
“그 집을 살 수 있소?”
“노인이 그 흉가를 사겠다는 말이오.”
“살 수만 있다면 사고 싶소. 싹 쓸어버리고 작은 집 하나 지어 살 생각이오.”
“하이고 그러기 전에 생목숨이 달아나오. 지난 번 사람도 집을 쓸어버리고 짓겠다고 했는데, 그날 밤 저 세상으로 갔소. 꿈도 꾸지 마시오.”
“죽어도 내가 죽는 일이오. 어떻게 살 수 없겠소?”
“정 그렇다면 내가 중개를 해주리다. 하지만 죽어도 난 모르는 일이오.”
그날 김 노인은 뜬금없이 흉가로 버려진 귀신 집을 샀습니다. 직장을 나오면서 자기 몫으로 남겼던 돈을 거의 다 털었습니다.
“오늘은 내가 하룻밤을 묵고 집에 갈 테니 그리 아시오.”
김 노인은 전화로 집에 알리고, 그날을 그 흉가에서 자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입니다.
초저녁에 잠시 떴던 초승달이 지자, 깊은 어둠이 세상을 덮었습니다.
밤 12시 무렵입니다. 살포시 잠이 들었던 김 노인이 살며시 눈을 떴습니다.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무엇인지 우르르 몰려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애들아! 오늘은 웬 사람이 자고 있구나.”
“그렇담, 슬슬 장난을 쳐볼까?”
“좋아. 오늘도 청계 귀신으로 변해 놀래켜주도록 하자.”
“지금까지 우리 일곱 황금귀신의 손에 죽은 바보 같은 인간들이 몇이냐?”
“인간들은 바보야. 우리가 황금인줄도 모르고 무서운 악귀인 청계귀신인줄만 아니 말야.”
“그런데 우리가 청계귀신이 아니고 일곱 황금귀신인줄 알면 어쩌지? 우리가 황금덩어리인줄 알면 좋아서 펄쩍펄쩍 뛰겠지.”
“그러다 황금에 눈이 멀어 부모도 몰라보고 자식도 몰라보고 쌈박질을 해대겠지. 그러는 자들이 인간들이니까.”
“맞아! 특히 돈 있는 놈들이 더 하지. 99개 가진 놈이 백 개를 채우겠다면서 한 개 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 것을 빼앗으니까. 아무튼 우리 황금을 탐내는 인간들은 죽든지 말든지 우리가 알바 아냐.”
“좋아. 얘긴 나중에 하고 얼른 청계귀신으로 변하자. 황금에 눈이 먼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인간을 혼내주자.”
황금덩어리들이 우르르 김 노인을 덮치려할 때였습니다.
“야! 잠깐!”
그 순간이었습니다. 당황해하는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저 노인은 사람이 아냐.”
“뭐라고?”
“저 노인은 청계지옥에서 저승사자로 일하던 분이야. 청계귀신을 잡아오다가 놓친 죄 값으로 이곳 이승에 귀양을 온 분이야. 이제 곧 그 죄 값을 다하고 다시 저승사자로 돌아갈 분이야.”
“그렇담 큰 일 날 뻔 했잖아. 우리가 청계귀신으로 변했다면 저 노인에게 잡혀 청계지옥으로 갈 뻔했잖아.”
“그러게. 휴우! 미리 알아봐 다행이네. 그러나 어쩌지?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들켰으니 하는 수 없지. 저 분은 청계지옥의 저승사자셨어. 우리 황금덩어리를 보고 욕심을 부릴 분은 아냐. 이제 저 분에게 우릴 맡기는 수밖에 없지. 우릴 좋은 일에 쓰시라고 해야지.”
“그래 좋아. 내일 날이 밝으면 우릴 찾아낼 거야. 그러니 이제 대숲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자.”
한참 얘기를 나누던 황금덩어리들이 우르르 대숲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입니다.
김 노인은 괭이와 삽을 사와 대숲으로 갔습니다. 어렵지 않게 황금덩어리를 일곱 개나 팠습니다.
김 노인은 너무 기뻤습니다.
그것은 황금덩어리를 얻어서 기쁜 게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줄을 알게 되어서 기뻤습니다. 왜 자신이 염습 일을 그렇게 잘하는 지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전생에 청계지옥의 저승사자였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이제 이승에서 죄 값을 치르면 다시 저승의 청계지옥으로 돌아가 저승사자가 된다고 생각하니 새로운 힘이 불끈불끈 솟았습니다.
김 노인은 이제 죽는 날까지 염습 봉사를 하다가, 죽으면 청계지옥의 저승사자가 될 것입니다.
그땐 죽은 뒤 떠돌이 귀신이 되어 못된 짓을 하는 청계귀신들을 데려가는 일을 또 하겠지요.
참, 황금덩어리 일곱 개는 억울하게 죽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쓰기로 하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