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최대성 장군을 뵙다
신의 언어인 창조라니? 가소롭지만 어쩌랴? 그냥 무식한 년 놈으로 치부하고 침 한 번 퇴! 뱉고 만다.
창의가 적절한 말일 거다. 이 창의는 다양성이 근본이다. 획일화, 단일화, 주입식, 암기식 학습은 창의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만인의 삶이 엉켜서 이루어지고 이어지는 역사를 하나의 관점, 하나의 사고로 획일, 단일, 주입, 암기하자는 독재적 발상이다.
독재자들은 대부분 비참한 말로였다.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은 다까끼마사오 하나만 보더라도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맑은 가을 하늘을 보며 평화로워지는 마음에 갑자기 헬조선, 망한민국, 정신적 망명 등의 말이 비수가 된다.
‘태극기를 달아 애국합시다.’
아침 일찍 동사무소 여직원이 방송을 한다. 휴일 아침, 모처럼 애기도 봐야하고 집안일도 있을 텐데…. 작년엔 안하던 짓을 해야 하는 여직원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 속보이는 행태에 짜증이 난다.
누구를 위한 애국이란 말인가? 10월 9일! 그래서 이 날도 태극기를 달지 않았다. 나가며 아파트를 올려다보니 딱 한 집만 걸려있다. 방송을 안했던 작년엔 꽤 여러 집이 달았었다. 물론 그 땐 나도 달았었다.
최대성 장군을 뵈러 간 날은 2015년 10월 7일이다.
오랜만에 월강 친구와 함께 보성 득량을 향했다.
황금물결, 바람이 잔잔한데도 눈부신 햇살에 오곡이 익은 들녘은 넉넉했다.
득량은 ‘식량을 얻는’ 고을이다. 임란 때 이곳의 식량이 우리 수군을 살렸고, 그래서 우리가 지금도 목숨 줄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름을 얻은 득량은 예로부터 천혜의 식량창고로 우리네를 살려온 고을이다. 눈 앞 보성만의 청정해수는 물 반, 고기 반이요, 뻘밭에는 낙지, 조개, 아! 그렇다. 여기 겨울 꼬막은 꼬막이 아니라 피와 살이다.
통통 살 오른 싱싱한 꼬막을 솥에 넣고 삶는데, 이 때 한쪽 방향으로만 저어야 한다고 한다. 또 너무 푹 삶으면 맛이 떨어진다.
한쪽 방향으로 젓다보면 꼬막이 배시시 입을 벌리고 불그레 피를 흘린다. 그때 먹어야 한다. 짭조름하면서 달착지근한 그 겨울꼬막 맛! 더 이상 무슨 찬사가 필요하랴?
솥뚜껑처럼 큰 피꼬막도 있다. 털이 부수수 달린 입을 열어재키면 붉은 피가 한 대접이다. 그래서 피꼬막이다. 꼬막살은 촉촉하고 야들야들 검붉다. 비릿한 향기가 은밀하기까지 한 그 피꼬막 한 개면 둘이 앉아 배부르다.
그러니 식량창고 득량은 도둑놈들이 욕심내던 고을이다. 그래서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조한 고려 말의 오봉 산성지가 고을의 주산 오봉산에 있다.
먼저 득량 고을 들머리인 기럭재의 기러기휴게소에서 잠시 쉰다. 이 고개는 안치, 또 쇠실이라고도 부른다. 안치는 기러기재의 한자말이고, 쇠실은 가까이에 쇠실 마을이 있어서인가 보다.
휴게소 위쪽에 일제강점기 독립지사였던 박문용 의사의 기적비와 쇠실마을에서 40여일을 은거했던 백범 김구 선생 추모비가 있다.
또 이 기럭재는 전투 시 성벽 역할이었을 거다. 적을 살피고 막아내기에 좋은 지형을 갖춘 곳이다.
눈앞에는 너른 들녘이다. 그 들녘으로 내려서면 사거리가 나온다. 바로 군두 사거리다.
직진하면 예당으로 가고 왼쪽은 득량발전소를 지나 겸백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득량면 소재지를 거쳐 득량만으로 가는 길이다.
바로 이 군두, 군머리에서 최대성 장군이 왜구와 싸우다 순절하셨다.
최대성 장군을 뵙기 전에 잠시 예당쪽으로 가다 박실마을에 들렸다.
보성의 3대 명촌 마을이라는 이 박실 마을은 이름 그대로 박씨들의 마을이고, 양팽손 선생의 후손들이 사는 양씨들의 마을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끝 무렵이니 정유재란 때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이곳 박실 마을에 이르렀다. 무능한 선조의 생뚱국문에 성치 않은 몸이었다. 더욱 구례에서 여기까지 걸어오시느라 힘드셨는지 장군은 몸살이 낫다고 한다. 그래서 1597년 음력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일정보다 더 머물렀다 하신다.
물론 최대성 장군도 만나봤다. ‘어제는 송희립과 최대성이 보러 왔다.’ 난중일기 1597년 8월 11일자의 기록이다.
그 난중일기에 따르면 그 때 머문 곳이 양산항(梁山杭)이란 분의 집이었다 한다. 장군이 초서로 쓴 항(杭)을 원(沅)으로 읽어 양산원의 집으로 잘못 알려졌다고 월강이 설명해준다.
‘이순신 장군님!’
부르니 금방이라도 장군께서 문을 열고 나오실 듯 하다.
하지만 가을 햇살만 다사롭다. 최근에 복원했다는 오매정(五梅亭)이란 멋진 이름의 정자가 사백년 세월의 자리를 말없이 지킬 뿐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원균이 말아먹은 수군을 재건하며 이곳에서는 식량을 얻어, 장흥, 강진, 그리고 죽음의 장소인 명량으로 가셨다.
문득, ‘죽음을 알고 죽으로 가셨을 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으로만 애민을 부르짖던 당시 선조 이하 벼슬아치들의 꼬라지를 생각하면 차라리 백성을 위해 죽으리라 그리 결심하셨을 거다. 그 잘난 벼슬아치들의 모습에 요즈음 너도 나도 ‘새 당을 만들세.’ ‘공천권이 어딘데? 너한테 주냐?’ ‘먼박, 가까운박’ 박가랭이에 고개 디밀고 ‘휴지에 묻은 오줌도 핥세’ 하는 아귀다툼 종자들의 모습이 한 치도 틀리 지 않게 겹친다.
어찌 우국지사, 애민의사들을 뵙는 자리만 오면 이렇게 뜬금없이 욕이 튀어나올까?
박실 마을을 나와 잠시 숨을 고른다. 욕도 아깝다. 잘 먹고 잘 살아라. 하지만 결코 네 년 놈들에게 굽히지는 않을 거다.
그리 잡생각을 애써 털며 군두 사거리로 돌아와 득량 소재지쪽으로 간다. 당시 임란수병들에게 식량을 줬을 들녘, 자신의 죽음터를 바라보는 곳에 자리한 최대성 장군 사당에 이른다.
종이컵에 막걸리를 따라놓고 잠시 고개 숙인다.
막걸리 두어 잔에 기분이 좋다.
‘장군님!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야! 돌쇠, 마당쇠, 떡쇠, 삼돌이, 개똥이…. 이런 이름의 우리 조상님네들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그래, ○○ 덕분에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푸하하하!”
월강과 함께 소리 내어 웃고 득량 소재지로 간다.
득량역이 1970년대의 추억의 거리로 꾸며져 있었다. 남도해양관광열차도 정차한다고 했다.
흥취에 젖어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유치원 꼬맹이들의 재잘거림이 사랑스럽다.
그래, 너희들이 희망이고 미래다. 이순신 장군이, 최대성 장군이 죽음으로 이 땅을 지킨 이유가 바로 너희들을 위해서였지 않겠느냐?
득량역을 한 바퀴 둘러보고 배를 건조해서 얻은 이름인 선소 마을로 간다. 그곳 비봉에서 1억 년 전 휘젓고 다녔던 공룡을 만나고 율포로 간다.
안 주인의 웃음이 정겨운 횟집이었다. 요즈음 제철인 전어회무침에 밥을 비벼 돈배젖(전어밤젖)을 얹어 맛있게 먹었다.
오늘 이 글을 쓰며 최대성 장군님께 또 큰 절을 올린다.
최대성 장군
역사가 무슨 소용 있으랴?
오늘은 창조
내일은 태극기 애국
다시 어제로 돌아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
역사가 돈 놓고 돈 먹기도 아닌데
하는 짓거리는
숫돌에 칼이나 갈아
시커먼 꽁보리밥 한 덩이
미쳐 목을 넘어가지도 않았는데
꽁밥풀테기 걸려있는 그 목을
오늘도 싹둑 잘라간다.
최대성 장군님!
낫이나 도끼, 죽창이라도 챙겨
군두 사거리로 갈까요?
(2015. 10. 10)
<기럭재 쇠실쉼터의 김구 선생 은거추모비>
<일제강점기 박문용 의사 기적비>
<최대성 장군이 순절한 군두 사거리>
<이순신 장군이 머무셨던 집 앞의 오매정>
<이순신 장군이 머무셨던 집>
<보성 3대 명촌 마을인 박실마을>
<오매정과 이순신 장군이 머무셨던 집>
<최대성 장군 사당>
<최대성 장군이 전투를 벌렸던 군두 사거리 주변 들녘>
<충절사>
<최대성 장군>
<막걸리 한 잔 올립니다>
<득량 추억의 거리>
<득량역>
<선소>
<공룡알>
<득량만, 건너보이는 곳은 고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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