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속 사랑의 여신들

나주 고을 사랑 이야기 셋-그 마지막

운당 2015. 8. 25. 06:57

3. 사랑 셋. 숙명으로 만난 화끈한 사랑 왕건과 장화왕후

 

<장화왕후 유적비>

<장화왕후와 왕건-이 조형물을 볼때마다 고압적인 느낌이 들어 못마땅하다.

왕건은 말에서 내리고 왕후는 한손은 버드나무 가지, 한 손엔 물 바가지였으면 오죽 좋으랴

이 이야기의 안쪽 주제는 현명함이고, 바깥쪽은 바로 버들잎이기 때문이다.>

<돈만 들여 생각없이 동상을 세운 본보기인듯 싶다. 이렇게 사랑도 고압적이니 이 나라가 백성을 대하는 태도가

장기판의 졸만도 못하게 여기는 것 아닐까? 소통은 눈 높이를 맞추는 것 부터 시작이다>

<완사천의 유래>

<완사천. 나라면 말에서 내리지 않은 자에게 물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장수는 백성의 생명을 가볍게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왕건은 말에서 내려 정중하게 물을 청했을 것이다.>


신라말엽이다. AD 900년에서 앞뒤로 10~20년을 왔다 갔다 하는 시기다.

영산강을 기점으로 서남해안을 주무르는 항구는 목포항이었다. 나무기둥을 세우고 판자로 선착장을 만들었다 해서 목포항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목포항은 지금의 목포가 아니라 나주에 있었다.

그 나주의 목포항을 중심으로 서남해안과 제주도, 중국 등을 오가며 고기를 비롯하여 각종 물자를 사고파는 한 무리의 상단이 있었다. 목포상단 우두머리는 오다련이었다. 그 목포항 한 가운데쯤 창고가 즐비한 집이 그의 집이었다.

오다련이 아버지로부터 상단의 우두머리를 물려받고 얼마 되지 않은 때다. 하루는 깜빡 낮잠을 자는데 암수 두 마리의 용이 서해 바다에서 올라왔다. 그러더니 수용은 북쪽으로 날아가고 암용은 그대로 목포항 자기 집으로 날아오는 것 아닌가?

그 순간 깜짝 놀라 잠을 깼다.

용이다. !”

벌떡 일어난 오다련은 마루에 서서 물결치는 항구를 바라보았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이구 마님! 용이라니요?”

어허! 그것 참 기이한 일이다. 글쎄 암용이 우리 집으로 날아오는구나.”

용이라니요? 아무 것도 없는데요.”

마침 지나가던 하인이 어리둥절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이놈아! 분명 용이었다. 그것도 암용이었다.”

마님! 그런데 용이 암컷인지, 수컷인지 어찌 아시는 감요?”

이놈아! 만물은 다 암수가 있다. 용도 암컷과 수컷이 있는 법이다. 수용의 뿔은 아래쪽 뿌리보다 위쪽이 더 두텁고, 갈기는 뾰족뾰족하다. 또 비늘이 빽빽하게 겹쳐졌느니라. 암용의 뿔은 수컷과 반대로 위쪽 끝이 가늘다. 또 코가 똑바르고 갈기가 부드러우며 비늘도 얇게 겹쳐졌다. 그리고 꼬리는 여자 엉덩이처럼 펑퍼짐 부드럽고 뭉특하니라.”

하이고 마님! 참말로 그 암용이 우리 집으로 날아왔어요? 무슨 일로 왔을 가요?”

글세 말이다. 가만있어봐라. 그 암용의 발톱이 분명 다섯 개였다. 그렇다면 오조룡! 이거 왕의 기상 아닌가? 그렇다면.”

오다련과 하인이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하녀가 잰 걸음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마님! 마님! 경사입니다. 안방마님이 방금 아기를 낳았습니다.”

딸이더냐?”

! 마님! 어찌 아시어요?”

그렇구나. 그 암용이 바로 우리 집에 태어났구나.”

오다련은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쳤다.

그렇게 해서 그 날 태어난 오다련의 딸은 오조룡이란 이름을 얻었다. 발톱이 다섯 개인 용이란 뜻이었다.

오조룡은 쑥쑥 자랐다. 계집애라 몸매는 작고 날씬했는데 커갈수록 얼굴이 활짝 펴져 목포항에서는 제일 예쁘다는 소릴 들었다. 하지만 하는 행동은 사내였다. 민첩하고 억셌으며 또한 힘이 장사였다.

한마디로 치마 두른 남아대장부였다. 남자들 놀이인 재기차기며 비석치기도 잘했고, 씨름판에서도 오조룡이를 당할 또래가 없었다. 돌팔매, 작대기 휘두르는 전쟁놀이를 하다 오조룡에게 잘 못 걸리면 코피가 터지고, 이마에 혹을 다는 건 그냥 예삿일이었다.

그렇게 계집아이 오조룡은 사내 녀석들을 거느린 목포항의 대장이었다. 항구에 나타나면 사내 녀석들은 오조룡의 말에 꼼짝없이 굽신굽신, 설설 기었다. 다 한 번쯤 오조룡의 주먹과 발길질, 돌팔매와 작대기 맛을 봤던 것이다.

그래도 여자는 여자였다. 오조룡이 나이 들어 시집갈 때가 되니 오다련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누가 저 아이를 데려갈꼬?”

오조룡만 보면 굽신굽신 설설 기는 사내 녀석들을 보면서 오다련은 한숨을 내쉬었다.

때는 바야흐로 AD 903년이다.

그 어느 날이다. 오다련은 또 꿈을 꾸었다.

십 수 년 만에 꾸는 용꿈이었다. 북쪽 바다에서 수용이 내려오더니 다시 영산강을 거스르며 나주의 목포항 자기 집으로 날아오는 것 아닌가?

이번에도 깜짝 놀라 일어나니, 하인이 헐레벌떡 달려온다.

마님! 마님! 태봉국 병사들입니다. 수군, 기병들이 목포항에 들어왔습니다.”

태봉국 수군과 기병들이 목포항으로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목포항 상단의 우두머리 오다련도 후백제 견훤 군과 태봉국 궁예 병사들이 영산강 들머리인 나주의 목포항을 차지하기위해 일진일퇴 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먼 바다를 오가며 무역에 종사하는 상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투자하고, 교류하는 집단이었다.

그렇게 장사하는 상단은 대립하는 어떤 세력에게도 미운털이 박히지 않도록 중립적인 위치를 지켰다. 상단의 우두머리는 그런 정치력을 발휘할 책무가 있었고, 그런 능력이 있어야 했다.

또한 서로 대립하는 어떤 정치세력도 상단의 물적 도움이 필요했고, 이왕이면 큰 협조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되도록 상단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설령 상단이 몰래 상대방을 도와주는 걸 알아도 웬만한 건 눈을 감았다. 그게 상단과 서로 상존하며 생존하는 현명한 방법이란 걸 정치세력은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맞서는 정치세력 중 어느 쪽이 이기든, 이기는 쪽 편에 서는 게 상단의 운명과도 직결이 되었다.

그래서 오다련도 일단은 가까이에 있는 견훤을 도왔다. 그리고 자의 반 타의 반 꽤 많은 물자와 배까지 징발에 응했다. 하지만 태봉국 궁예도 무시 못 할 세력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큰 관심을 갖고 견훤과 궁예, 두 세력의 운명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신라는 지는 해요, 남쪽의 견훤, 북쪽의 궁예는 떠오르는 해였다.

그 견훤이 세력을 키우는 남쪽에는 영산강의 목포상단이 있었고, 그 우두머리는 오다련이었다.

궁예가 세력을 키우는 북쪽에는 예성강의 개성상단이 있었고 그 세력의 우두머리는 왕건의 아버지인 왕융이었다.

왕융은 세상을 꿰뚫어 볼 줄 알았다. 신라가 기울고 태봉이 흥성하자, 개성상단의 우두머리요 송악군 사찬(沙粲)이기도 했던 그는 송악군()을 궁예에게 바치고 금성태수를 거머쥐었다. 태봉국 궁예에게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왕융의 아들 왕건 역시 큰 그림을 품에 안은 잠룡이었다. 개성상단 재력의 후원, 아버지의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군인으로서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900년에 광주(廣州), 충주(忠州), 청주(靑州,淸州), 당성(唐城,화성), 괴양(槐壤,괴산) 등 여러 군현을 빼앗아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그의 나이 37, 903년이 되었다. 왕건은 마침내 수군을 거느리고 전라도지방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수군만 가지고는 안 되겠다 싶어 함평 군유산 삼청동에서 3천여 기병을 조련한 뒤, 금성(錦城나주)까지 왔다.

그리고 영산강에서 견훤의 군대를 맞아 수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기병의 승리로 마침내 읍성인 금성읍성을 점령코자 목포항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 과정에 영산강 목포 상단 우두머리인 오다련 역시 궁예에게 큰 투자를 했다.

함평 군유산 삼청동은 천혜의 요지였다. 수많은 병사가 은밀히 기거하기에 적지였고, 바다와 너른 들이 있어 물산이 풍부했고, 교통이 편리했다. 적을 막기에도, 치기에도 좋은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었다. 또 군유산 골짜기 마구청은 수많은 군마를 키우고 기병술을 조련하기에 좋았다. 오다련이 그곳 군유산 삼청동과 마구청을 태봉국 궁예를 위해 내놓았던 것이다.

예성강 개성 상단의 왕융, 영산강 목포 상단의 오다련 이 두 사람은 젊은 시절에 서로 안면을 익힌 사이였다. 상단을 이끌고 중국, 남방 등지를 다니며 정보를 교환하고, 위험을 함께 헤쳐 나가기도 했었다.

어느 날 왕융이 비밀 서한을 보내 태봉국 궁예에 대한 투자를 요청했고, 오다련은 그걸 수락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함평 군유산 삼청동과 마구청이었던 것이다.

영산강의 목포 상단으로부터 협조해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이제 이 기회를 살리는 몫은 네 차지다.”

아버지 왕융으로부터 그 정보를 얻은 왕건은 뛸 듯이 기뻤다.

당시 궁예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현명하고 용감한 지도자였던 궁예가 자신이 곧 미륵불이라는 망상에 빠져 차츰 남을 의심하고,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다는 관심법을 내세워 걸핏하면 부하에 대한 살인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왕건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궁예로부터 멀리 떨어지려 했고, 후일의 대업을 위해 자기 기반을 더 넓히는 전략으로 남쪽 정벌을 나서고자 했다. 그러던 차에 필요한 군량, 군마, 군영터가 생겼으니 마치 하늘을 얻은 기분이었다. 곧바로 궁예를 만나 남쪽정벌을 자원했다.

궁예 대왕님! 남쪽으로 내려가 견훤을 토벌하고 대태봉국의 위엄을 보이겠습니다.”

그러하라!”

궁예는 즉시 수락했고, 왕건은 궁예의 마음이 변할까봐, 또 그 즉시 길을 떠났던 것이다.

수군을 몰아 함평만에 이르렀고, 순조롭게 군유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현지에서 병사를 더 모집하면서 수군을 재편성 삼천기마병을 길렀던 것이다.

그 수군과 기병으로 수륙양공을 하면서 마침내 나주 가까이 이르렀던 것이다.

태봉국 병사가 군유산을 나와 마침내 영산강까지 왔습니다.”

오다련은 수시로 상단 부하들의 보고를 받았다. 태봉국 젊은 장수가 군유산에서 군을 재편성, 삼천기병을 거느리고 승승장구 금성을 향해 영산강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융의 아들이 그 병사들의 대장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마침내 태봉국 젊은 장수 왕건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버님으로부터 말씀 잘 들었습니다.”

대망의 금성(나주)정벌을 앞두고 그렇게 목포항을 확보한 왕건은 호위 부하들을 제치고 단기로 말을 몰아 오다련 앞에 군례를 올렸다. 지금까지 도와준 은혜에도 감사하였다.

! 저 왕건이 바로 그 수컷용이구나. 내 딸 오조룡의 짝이구나.’

오다련은 첫 눈에 왕건이 맘에 들었다. 늠름하게 잘 생긴 모습도 모습이지만, 발톱이 다섯인 수컷용의 화신 왕건이 필시 왕이 되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상인이라면 바로 이렇게 큰 장사를 할 줄 알아야지. !’

오다련은 그날 목포항 개항 이래 가장 크고 풍성한 잔치를 벌여 왕건과 그의 부하들을 배불리 취하게 했다.

그리고 은밀히 오조룡을 불렀다.

얘야! 너 왕건이 어떻더냐?”

겉보기엔 쓸만했지요.”

그래. 그렇담 더 말 않겠다. 꽉 잡아라. 알았지?”

눈을 찡긋,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아버지의 말을 오조룡은 잘 알아들었다. 사실 맘속으로 왕건이 싫지 않았다. 처음 느끼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었고, 저 정도면 괜찮겠다 싶었다.

며칠 뒤다. 왕건이 금성읍성 정벌을 앞두고 병사들을 조련하고 있었다.

때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 초여름을 넘어서는 시절이었다. 한바탕 부하들과 함께 말을 달리며 창을 휘두르고, 활을 쏘고 칼을 맞대고 나면 한낮이었다. 그때마다 왕건은 완사천으로 와서 물을 한바가지 들이키고 말에게도 먹였다.

그날도 왕건은 한바탕 병사조련을 한 뒤, 물을 마시기 위해 완사천으로 왔다.

그런데 그날은 웬 아리따운 처자가 빨래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보우, 처자! 물 한 그릇 주시오.”

말에서 내린 왕건이 점잖게 물을 청했다.

, 드시오.”

처자는 시원한 샘물을 한 바가지 뜨더니, 한 손으로 실버들 가지를 쭉 훑어 그 중 몇 잎을 물그릇에 동동 띄웠다. 그리고 그 물 바가지를 왕건에게 내밀었다.

목마를 땐 그냥 벌꺽꿀꺽 들이켜도 시원찮은데, 버들잎이 있으니 훌훌 불어가며 마셔야했다. 그렇게 조심스레 물을 마신 왕건이 물었다.

이보우, 처자! 도대체 왜 버들잎을 물에 띄워 준거요?”

오조룡이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장군님! 목마를 때 물을 급히 마시면 체한답니다. 물에 체하면 약도 없지요. 그래서 천천히 마시라고 그랬습니다.”

왕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동안 전투에 열중하느라,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런데 이런 아리땁고 현명한 처자가 있다니.

아리땁고 현명한 처자, 그녀는 바로 오조룡이었다. 왕건의 눈에, 이어서 가슴으로 오조룡이 쿵하는 소리와 함께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어디 사는 처자요.”

그동안 저는 몇 번 장군님을 봤지요. 제 아비가 오다련이지요.”

하긴 집에선 남자 옷을 입고 다니는 오조룡이었는지라, 왕건이 봤대도 기억할 리 없다.

처자! 고맙소.”

왕건은 곧 바로 말을 달려 오다련의 집으로 갔다. 오다련을 만나 청혼을 했다. 딸인 오조룡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때 왕건은 이미 아내가 있었다.

이 사람아! 그러니 자네 첩으로 달라는 말인가?”

아니올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오조룡을 제 본처로 하겠습니다.”

그리해서 왕건이 개성에서 결혼한 개성 호족 천궁의 딸 유씨와, 나주 오다련의 딸 오조룡은 왕건의 두 부인으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아무튼 왕건과 오조룡의 첫날밤이다.

옷을 벗기려는 왕건의 손을 오조룡이 툭 쳐냈다.

이거 왜 이러오?”

몇 가지 물읍시다.”

뭐요?”

듣자하니 개성에 있는 유씨 말고도 장군이 전투를 치른 고을에서 숱한 처자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데 그게 사실이오.”

그렇소.”

그리고 그 처자들에게 임신을 시키지 않으려 방편을 썼다는 데 그것도 사실이오?”

그렇소.”

나를 정식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아버님에게 약속을 했다는 데, 그것도 진심이오?”

그렇소.”

그럼 내게는 임신을 시키겠소? 아님 또 마지막 순간에 방편을 쓰려오?”

그건.”

그에 대해 확답을 주지 않음 난 절대로 옷을 벗지 않겠소.”

목포항을 주먹과 발길질로 주름잡은 암컷용의 화신인 오조룡다운 솔직한 물음과, 천하대업을 꿈꾸는 젊은 장수이며 수컷용의 화신인 왕건답게 솔직한 대답이 오고갔다.

하지만 오조룡의 마지막 물음에 왕건은 대답을 미적였다.

대답을 못하시면 난 옷을 벗지 않겠소.”

오조룡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치맛자락이지만 단단히 추스르며 몸을 휙 돌렸다.

잠깐!”

왕건이 오조룡의 손을 덜컥 움켜잡았다.

오늘은 방편 없이 사랑을 나누겠소. 그리고 당신이 임신하면 축하주를 마시겠소.”

아름다운 모습과 솔직하고 명쾌한 언변의 오조룡에게 왕건은 홀딱 반하고 말았다. 그랬으니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고 태어남은 인간 남녀 결합의 순리요, 생명순환의 당연지사였다.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이름을 라 했다. 훗날 고려 2대 왕 혜종이 바로 그다.

왕건은 그렇게 10여년 목포에 머무르며 금성을 점령하고 주변 10여 군현을 빼앗아 궁예 태봉국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벼슬도 올라 알찬(閼粲)으로 승진했다.

그 나주에서의 전공은 왕건의 지도력과 용맹함에 기인했지만, 부인인 오조룡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오조룡의 내조와 일단 유사시의 전면적인 활약이 왕건의 목숨을 여러 차례 구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투를 치르는 장수와 병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칼 등 병장기였다. 녹슬거나 허술한 병장기는 죽음과 바로 직결이었다. 그래서 장수와 병사들은 항시 자신의 병장기를 갈고 닦아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때 필요한 게 숫돌이었다. 싸움에 나서는 장수와 병사는 다 그 숫돌을 하나씩 차고 다녔다. 또 질 좋은 숫돌은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숫돌이 아무데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오다련이 누구인가? 신라말엽 나라가 뒤숭숭하면서 큰 전투가 있을 거라는 풍문이 돌았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숫돌 광산을 하나 확보해놨던 것이다. 그리고 딸인 오조룡을 시켜 그곳 숫돌 광산에서 수많은 숫돌을 생산했다. 그 숫돌을 팔기도 했지만, 은밀히 비축도 해두었다.

그 숫돌광산은 신북의 여석산이었다. 전라남도 나주시에서 영산포를 지나 영암으로 가는 도중에 신북면이 나온다. 바로 그 신북의 여석산은 질 좋은 최상품의 숫돌산이었다.

오조룡은 그곳 여석산에서 캐낸 제일 상품 숫돌로 매일 저녁 왕건의 칼 등 병장기를 손수 갈았다. 전투에 지친 왕건이 잠을 자는 동안 오조룡은 그런 방법으로 남편을 지켰다.

그뿐이 아니다. 나주에 자리했던 고대 마한왕국의 목지국이 최후로 세력을 폈던 곳이 반남고을이다. 왕건이 그 반남의 자미성에 주둔하며 견훤군과 일전을 벌일 때다. 자미성은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도 좋고 공격하기에도 좋은 천혜의 요지였다. 그래서 왕건은 상당기간 자미성에 머무르며 견훤군과 대치를 했다.

그날은 오조룡이 아들 무를 데리고 그곳 자미성으로 왕건을 보러 왔다. 이틀 째 자미성안 성채에서 잠자리를 했을 때다.

새벽녘이다. 함성소리와 함께 타오르는 불빛으로 사방이 훤히 밝았다.

적이었다. 급습을 한 것이다.

왕건은 간밤에 많이 마신 술로 아직 깊은 밤중인데, 오조룡이 아들 무가 칭얼거리는 바람에 눈을 떴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빨리 치마를 찾아 가슴 위로 질끈 동여매고 밖을 엿보니, 이미 적병이 흙담을 허물어뜨리고 집 앞마당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왕건의 칼은 어젯밤 잘 갈아 벽에 걸어놓았다. 오조룡이 다급히 그 칼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그 칼을 집기도 전에 방문이 와지끈 부서지며 몽둥이를 든 적병 둘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다짜고짜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왕건을 향해 몽둥이를 내리쳤다.

일촉즉발! 언제 칼을 들고 말 시간이 없었다. 오조룡은 번개같이 몸을 날려 적병의 발을 걸면서 손에든 몽둥이를 낚아챘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에 다른 한 놈의 머리통을 박살내버렸다.

이놈들! 와라. 용서치 않겠다.”

오조룡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수처럼 소리치며 몽둥이를 휘둘렀다. 흙담을 넘어오는 적병의 머리며 몸뚱이며 다리 정강이를 가리지 않고 박살을 냈다.

불을 꺼라.”

날아온 횃불에 불이 붙어 집이 타기 시작했다. 뒤늦게 달려온 왕건의 병사들이 불을 끄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리 피 튀기는 육박전이 지나가고 적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오조룡은 활활 불에 타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 불속에서 아들 무를 껴안고, 왕건까지 챙겨 밖으로 나왔다.

고려 태조 왕건과 후일의 2대 왕 혜종인 무, 오조룡은 그렇게 두 왕의 생명을 건진 것이다. 하지만 그날 아들 무는 얼굴에 화상을 입고 흉터 자국을 남겼다.

훗날 나주세력의 혜종이 왕이 되는 걸 시기했던 개성세력은 그 화상 흉터를 돗자리자국이라고 폄하했다. 왕건이 사랑을 나눌 때 아기를 갖지 않으려는 방편으로 돗자리에 사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 돗자리에 묻은 정액을 오조룡이 손가락에 묻혀 넣어 혜종을 임신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권력 앞에 물불을 안 가리는 사기협잡험담꾼들의 역사는 오래됐고, 지역감정도 그렇다고 본다.

왕건은 27명의 부인을 뒀다고 한다. 아무튼 그 수많은 부인 중 2 명이 왕후 칭호를 받았다. 한 사람은 개성출신 오 왕후이고, 또 한사람은 바로 오조룡인 장화왕후다. 그가 나주에서 낳은 아들 무는 고려 2대왕 혜종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1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 얘기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에 있고, 나주에는 오조룡 장화왕후와 태조 왕건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영산강의 옛 목포항은 KTX가 서는 지금의 나주역 일원이다. 영산강에 토사가 쌓이고 바다가 멀어지면서 목포항 지명도 차츰 남쪽으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나주의 목포항은 흥룡동이 되었다. 오다련의 용꿈이 지명이 된 것이다. 그리고 오조룡이 왕건에게 버들잎을 띄워 물을 준 완사천도 나주시청 들머리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천년의 세월을 넘어 숙명으로 만나 화끈한 사랑을 나누고 그 결실을 맺은 왕건과 장화왕후 이야기를 끝으로 2015년 한 여름의 사랑 이야기를 맺는다.

풀벌레 소리와 함께 다가서는 가을이다. 누구나 평생을 두고 추억할 아름다운 사랑을 만나길 기원하며 나주의 사랑 이야기 셋 그렇게 소망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