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속 사랑의 여신들

사랑의 여신, 해동국 자청비

운당 2013. 4. 15. 11:30

사랑의 여신 3

 

사랑의 여신, 해동국 자청비

 

<사랑과 풍요, 다산의 여신 자청비>

고구려 때문에 멸망한 왕조 수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수서(隋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 편 결혼에 대한 기록이다.‘시집가고 장가들 때에,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그것으로써 혼인을 성사시킨다(有婚嫁者, 取男女相悅, 然卽爲之)’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는 사랑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여기서 남녀상열(男女相悅), 그러니까 서로 기쁘다(相悅)’는 말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하지만 조선 전기의 유학자들이 고려시대의 대중가요를 가리켜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고 폄하하는 바람에, 순결한 사랑에서 순결한 느낌을 빼앗겼을 뿐이다.

 

신라의 진골귀족 김대문의화랑세기에 신라의 성()풍속도가 있다. 신라는 자유로운 성을 섬기는 개방적인 나라였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여러 남자들을 거느릴 수 있었고, 남매들 간의 결혼이나 남색도 크게 허물이 되지 않았다. 마복자(摩腹子)’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다. 마복자는배를 문지르다 가까워지다라는 뜻이니배를 맞춘 아이. 그러니까 여자가 임신을 한 상태에서, 남편보다 신분이 높은 이와 정을 통한 후 아이를 낳으면 임신 중에 관계를 맺었던 남자의마복자로 불렸다. 부인의 미색이 뛰어나서 사랑을 많이 받을수록 남편은 출세보장, 태어날 아이에게도 큰 권세가 이어졌다.

 

우리 선조들의 결혼풍습과 사랑의 여신이 무슨 관계일까만, 사랑에 더 자유로웠을 우리 고대 선조 할머니들은 왜 신화 속 사랑의 여신 한 명쯤이 되지 못했을까? 없는 걸 다행이라 여겨야할지, 안타까워해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랑 없이 오늘의 우리가 어찌 있을까?

 

1. 우리 네 사랑의 여신 자청비

 

자청비는 제주도의 전승 서사 무가세경 본풀이의 여자 주인공이다. 그녀는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하늘나라 옥황에게 오곡 씨를 얻어와 농경신이 된다.

세경은 농사의 신으로, 기후 신(상세경)인 문도령, 농사와 곡물의 신(중세경)인 자청비, 가축의 신(하세경)인 정수남인데, 본래 농경신은 생산의 신이니, 풍요와 번성, 다산이 책임이요, 권리다. 따라서 사랑의 신이기도 하다.

 

자청비 이야기는 짜임새도 구성도 엉성하다. 하지만 그건 신화시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들 생각일 뿐이다. 잘난 지배계층의 학문과 문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점, 구전인데도 길이와 내용이 풍부한 점에서 우리 선조들 상상력의 능력을 알 수 있다. 더욱 주인공 자청비의 원초적인 생생한 행동은 사랑의 여신으로서 자격요건이 충분하다.

 

2. 자청비의 탄생

 

옛날 제주도 주년국에 김진국 대감과 자주부인 부부가 살았다. 큰 부자였지만 50세에 이르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러던 중 동관음 상주사의 화주승이 시주를 와서 자식을 얻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때깔 좋은 물명주와 고깔 만들 종이, 대백미와 소백미, 일백 근을 마련하여 우리 절에서, 물에서 죽은 귀신, 뭍에서 죽은 귀신, 외로이 죽은 귀신을 위해 석 달 열흘 기도하면 자식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감 부부가 상주사로 향하는데, 도중에 서관음 백금사의 화주승이 자기네 법당 부처님이 훨씬 영험하다며 대감 부부를 회유하였다. 이에 대감은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백금사에 공양을 했다.

백일기도를 마치고 돌아와 태몽을 꾸는데, 감주에 호박 안주를 먹는 꿈이었다. 딸이 태어날 꿈이었다. 한편, 하녀 정술데기가 옆에 있다가 자기는 소주에 고기 안주를 먹는 꿈을 꾸었다 했다. 아들을 낳을 꿈이었다. 열 달 뒤, 자주부인이 건강한 여자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자청비(자청하여 낳은 딸)라 지었고, 정술데기가 낳은 남자아이는 정수남이라고 지었다.

 

여기서 호박은 식물이니 곡물의 신(자청비)이 될 상징이요, 고기는 동물이니 가축의 신(정수남)이 될 상징이다. 또 서방(西方)은 쇠가 많고, 가을을 의미하며 해가 지는 곳으로 음기가 강하다. 그러니 자청비를 낳게 한 서(西)관음 백금사의 주지는 결실의 의미다.

동방(東方)은 태양이 솟는 곳으로 청색이며, 봄을 의미하고 탄생하는 곳으로 양기가 강하다. 그래서 정수남을 낳게 한 동()관음 상주사 주지는 파종을 의미한다.

용모가 가냘프고 고왔으나 활달하며 여기저기 참견하길 좋아하고 베틀에 올라 옷을 짜는데 그 솜씨가 남달랐던 자청비는 씨앗을 키워 출산을 해야 하는 역할이다.

정수남은 몸이 크고 건장하나 불만이 많고, 일은 하지 않고 먹는 것만 밝혔으니 영락없이 파종만 즐기는 역할이다. 특히 자청비 앞에서는 더 일을 하지 않았다니 모계사회에서 부계로의 권력이동이 이루어짐을 시사하는 것이다.

여근 숭배는 여성만이 출산하는 줄 알았던 결실의 시대였고, 남근 숭배는 그 출산이 남근의 파종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애를 못 낳는 김 대감 대신 자청비를 낳게 해준 서관음 백금사의 화주승의 행위와, 약속을 어긴 김 대감을 골탕 먹이기 위해 상주사 화주승이 꿩(자청비 모친)대신 닭(하녀 정술데기)을 택해 정수남을 낳게 한 행위는, 고대의 종교가 대리파종의 역할도 했음을 의미한다.

 

이를 신화적으로 풀이해본다.

주년국에 가뭄이 들고 논밭이 말라붙어 모두가 굶어죽게 되었다. 이 때에 한 여인이 하녀를 데리고 물길이 말라버린 냇가로 나갔다. 하늘의 신께 비오기를 기도하니 결실의 신이 내려왔다. 둘은 버드나무 늘어진 냇가에서 사랑을 나누었고 잉태하니 자청비가 태어났다.

이 때 파종의 신도 함께 내려왔다. 하녀 역시 냇가 옆 누리장나무 우거진 곳에서 파종의 신에게 사랑의 씨앗을 받았다. 정수남이가 태어났다.

 

3. 자청비와 문도령의 만남

 

자청비가 열다섯이 되었을 때다. 정술데기의 손이 희고 고운 것을 보고 자청비가 그 비결을 물었다.

주천당 연화못에 가서 빨래를 하였더니 손발이 고와졌답니다.”

정술데기의 거짓말을 곧이들은 자청비는 옷가지를 들고 주천당 연못가로 향하였다. 자청비가 한창 빨래를 하는데 낯선 도령 하나가 천리마를 타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말에서 내린 도령은 물을 청하였고, 이에 자청비는 물 한 바가지에 수양버들 잎을 세 번 훑어 띄운 다음 건네주었다. 도령이 대뜸 화를 냈다.

아가씨는 얼굴과 마음이 다르오. 어찌 마실 물에 티를 넣으오?”

도령님! 물도 급히 마시면 체하는 법입니다. 그래 천천히 마시라고 일부러 버들잎을 띄워드린 것입니다.”

도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버들잎을 후후 불어 물을 마셨다. 그리고 자신은 문도령이며 하늘에서 내려왔고 주천강 남쪽 마을에 사는 거무 선생에게 글공부를 하러 간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자청비는 글공부를 하려는 쌍둥이 오라버니가 집에 있다고 둘러댄 뒤, 남장을 하고 나와 문도령과 동행을 했다.

 

동물의 근친혼, 식물의 근친교배가 유전적으로 폐해가 있음을 고대인들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외지인인 문도령은 유전적으로 좋은 새 씨앗인 것이다. 또 버들잎은 무엇인가? 물은 급히 마시면 체하니 조심해서 마셔라. 물론 그런 의미도 있을 것이다.

버드나무는 고대인들에게 종교적 의식, 의학적인 치료, 그리고 고리짝 등 생필품을 만드는 데 긴요하게 쓰였다. 또 물 긷거나 빨래터인 우물이나 냇가 등 남녀상열이 이루어지기 좋은 곳에서 사는 나무이고, 바람에 흩날리는 간드러진 모습이 아리따운 여인이기도 하다.

문도령에게 준 버들잎은 바로 자청비와 동일체다.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정표이기도 하다.

사랑하오. 처자!”

그 물이나 천천히 마시고 사랑을 합시다.”

다짜고짜 수작을 거는 문도령에게 자청비가 그리 대답을 한 것이다.

 

이를 신화적으로 얘기해보자.

인간의 여인과 하늘나라 결실의 신 사이에서 태어난 자청비는 결혼 적령기가 되어도 짝을 맺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짝을 맺어야 비로소 농사와 곡물의 신 역할을 하는 건데, 같은 인간과의 짝 맺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하늘에서는 자청비의 짝으로 한 남자를 내려 보냈다.

 

4. 동거와 이별

 

둘은 거무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글공부에 매진하면서 형제처럼 지냈다.

하지만 꽃다운 나이, 총각이 어찌 처녀 향기에 취하지 않으랴? 1, 2년이 흐르면서 문도령은 자청비의 성별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래, 내일 새벽에는 자청의 사타구니를 만져봐야지. 남자라면 새벽에 깃대를 세우겠지.’

이런 낌새를 알아차린 자청비는 물동이를 가져와 잠자리 사이에 놓고 붓대를 가로질러 걸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아버님께서 잠자는 중에 붓대가 떨어지면 과거에 낙방한다했지요.”

문도령은 자청비의 대답에 혹하여 자신도 따라하게 되었다. 매일 밤 붓대가 떨어질까 봐 안절부절 잠을 못 이룬 문도령은 공부까지도 자청비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초조해진 문도령은 자청비에게 오줌 내갈기기 시합을 제안했다.

크크, 이번엔 네가 여자라는 게 밝혀지겠지.’

문도령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자청비는 짐짓 태연하게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큰 대나무 붓통에 작은 구멍을 뚫어 바지 속 다리 사이에 끼웠다.

결과는 문도령이 열두자 반, 자청도령이 스무자 반이었다. 문도령의 참담한 패배였다. 자청비가 여자일 거다, 의심을 했지만 문도령은 물증확보에 실패한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3년이 되어가던 어느 날, 하늘에서 편지가 왔다.

색시감(서수왕 딸아기)을 정했으니 장가를 가거라.”

편지를 받은 문도령이 떠날 채비를 하였다. 뒤따라 나선 자청비가 문도령에게 주천강에서 목욕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제야 네 알몸을 보겠구나.’

하지만 문도령의 기대와는 달리 자청비는 상류에서 씻는 시늉만 하다가 버들잎에 편지를 써서 물에 띄웠다.

이 무심한 문도령아! 삼 년 동안 한방에 살며 남녀 구별도 못한 바보 같은 문도령아. 나는 집으로 가겠다.’

아니, 이럴 수가.’

버들잎 편지를 발견한 문도령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부랴부랴 뒤를 쫒아 자청비의 집으로 갔다.

나이가 열다섯 살이 안 되면 함께 자도 되지만, 더 먹었으면 안 된다.”

아버지, 문도령은 저보다 세 살 아래로 열다섯 살이옵니다.”

자청비는 거짓말로 부모님을 속였다. 그리고 여자 옷으로 갈아입었다. 마침내 아리따운 자청비와 잠자리에 든 문도령은 긴밤이 짧기만 했다.

다음 날 헤어지기 전에 문도령은 박씨 하나를 자청비에게 건네주었다. 내년에 박을 딸 때까지는 꼭 돌아오겠노라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봄이 찾아오고, 박씨를 심고, 열매가 항아리만큼 커져 딸 때가 지났지만 문도령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에 결혼 적령이 여성은 18, 남성은 15세 정도였고, 결혼을 하면 처가로 가서 첫날밤을 지내는 풍습임을 알 수 있다.

나이가 15 살이 안 되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함께 자도 된다. 하지만 15 이상이면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걱정 마세요. 우린 서로 사랑(相悅)하고 있으니 함께 자도 되지요?”

자청비와 김 대감의 진정한 말뜻은 그러했으니, 서로 사랑하면 결혼하는 고구려 풍습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이걸 신화로 엮어 보자.

자청비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몸을 함부로 주고 싶지 않았다. 문도령이 갖은 방법으로 자청비를 탐했지만, 자청비의 꾀를 당해내지 못했다.

마침내 문도령은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고, 다급해진 자청비는 스스로 문도령을 받아들였다.

 

5. 정수남의 유혹

 

정수남이 시름에 젖은 자청비에게 혹심을 품었다. 기회를 엿보며 자청비 앞에서 얼쩡거렸다.

게으름만 피우는 이 식충아! 당장 일을 하지 못하겠느냐?”

소와 말을 각각 아홉 마리, 도끼, 잠방이를 챙겨주오. 그럼 일하겠소.”

자청비는 정수남을 꾸짖었고, 정수남은 말과 소를 마련해 주면 당장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요구대로 챙겨주자 정수남은 곧장 산으로 갔다. 그러나 일은 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다가 자다가, 소와 말들을 모두 죽이고 말았다.

정수남은 죽은 소 아홉 마리, 말 아홉 마리를 한나절 만에 모두 구워 먹은 뒤, 남은 소, 말가죽을 짊어지고 배를 두드리며 내려오다 연못에서 오리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 오리를 잡으려고 도끼를 던졌지만 오리는 날아가고 도끼만 풍덩 빠져버렸다.

그 도끼를 찾겠다고 소, 말가죽을 내려놓고 잠방이까지 벗어던진 뒤 이리저리 뒤졌지만 도끼는 찾지 못하고, 가죽과 잠방이까지 도둑맞았다. 하는 수 없이 누리장나무 이파리로 대충 몸을 가리고 집에 돌아와 장독대 사이에 숨었다.

이 게으른 놈아!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꼴이냐?”

굴미굴산에서 문도령하고 놀다 이리되었소.”

자초지종을 따져 묻는 자청비에게 정수남은 문도령을 보았다고 핑계를 대며 이리저리 말을 꾸며내었다. 자청비는 문도령이라는 말에 정신이 나가서 다음날 정수남을 앞세워 문도령을 봤다는 굴미굴산으로 향하였다.

그럼 그렇지. 기회는 이 때다.’

정수남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정수남은 짝사랑하는 여인을 외지인에게 빼앗긴 사랑의 낙오자다. 소와 말 아홉 마리를 단숨에 먹을만큼 건장하고 힘이 센 총각이다. 어찌 사랑을 빼앗기고 눈에 불이 나지 않겠는가?

정수남은 가축의 신이다. 자청비를 집밖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가축을 모두 죽인 것이다.

 

이를 신화로 꾸며 보자.

청년이 된 정수남은 가축만 돌보는 게 싫증이 났다. 자청비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지만, 문도령에게 마음을 빼앗겨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에 화가나 가축을 모두 죽여 버리고, 자청비를 거짓으로 꼬여내 멀리 데리고 갔다.

 

6. 정수남을 죽임

 

어떻게든 자청비를 탐하려는 정수남은 가는 동안 내내 자청비를 골탕을 먹이며 느리작거렸다. 그러더니 연못가에 이르자,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겁이 난 자청비는 일단 잘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해가 지고 있으니, 먼저 오늘밤 보낼 움막을 짓자.”

그래, 맨 땅에서 첫날밤을 보낼 순 없지.”

신이 난 정수남이 나서서 돌을 주워오고 나무를 잘라오는데, 그 행동이 민첩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짓기는 지었으나, 나무로 얼기설기 얽어서 구멍이 숭숭 나있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 불을 피울 테니 너는 바깥에 있다가 불 비치는 구멍을 풀을 베어 막아라.

자청비는 또 꾀를 냈고, 정수남은 순순히 그에 따랐다.

이윽고 정수남은 구멍을 막았고, 자청비는 그때마다 반대쪽에 구멍을 냈다. 그러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구멍을 막고 뚫고 하다 보니 날이 밝고 말았다.

화가 난 정수남이 미친 듯 날뛰었다. 자청비는 또 꾀를 내어 정수남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누우라고 달래었다. 정수남은 또 꾐에 넘어가 자청비의 무릎을 베고 누었다 곤히 잠이 들어버렸다.

자청비는 기회를 놓칠세라 정수남의 정수리를 나뭇가지로 찔렀고, 정수남은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렸다. 죽일 맘까지는 없었던 자청비가 당황하는 사이 정수남의 몸에서 갑자기 부엉이 한 마리가 나오더니 자청비를 쏘아보고는 날아갔다.

 

이 땅에는 곡식도 필요하지만, 가축도 있어야 하는 거야. 나와 결혼 하지 않으면 이 땅에서 영영 가축을 볼 수 없을 줄 알아.”

그래, 알았어. 그러니 우리 먼저 살 집부터 마련하자.”

정수남의 협박에 자청비는 그리 대답했지만, 문도령과의 달콤한 사랑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정수남의 입장에서 보면 야속하기 짝이 없는 자청비다.

부엉이와 올빼미 소쩍새는 다 올빼미과의 새들이다. 이른 봄 부엉이가 부엉부엉소쩍새가솥적, 솥적하고 울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그 풍년 들게 하는 새가 쏘아보고 날아갔다는 것은 농경의 신인 자청비에게 큰 위기가 왔음을 의미한다.

 

이를 신화로 만들어 보자.

자청비를 꼬여내는 데 성공한 정수남은 짓궂게 자청비를 탐하였다. 하지만 자청비는 끝내 허락하지 않고 정수남을 죽여 버렸다. 이크, 무섭다.

 

7. 정수남이 살아 남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계집아이가 사람을 죽였다면서 자청비를 쫓아버렸다.

자청비는 다시 남장을 하고 활과 화살통을 둘러메고, 사람 살리는 꽃, 죽이는 꽃이 피어 있다는 서천꽃밭으로 길을 떠났다. 환생꽃을 찾아 헤매던 자청비는 어린아이 셋이 부엉이 한 마리를 놓고 싸우는 걸 보았다. 자청비는 아이들에게 부엉이를 산 뒤 화살 하나를 꽂아 서천꽃밭으로 던졌다. 그러자 꽃밭지기의 막내 딸아이가 나왔다.

자청비는부엉이에게 화살 한 대를 쏘았는데 꽃밭으로 떨어졌습니다. 부엉이와 화살을 찾고 싶습니다.’라고 사정을 했다.

얘기를 들은 꽃밭지기는 그러잖아도 부엉이 한 쌍이 살면 꽃밭에 흉한 일이 생긴다면서 남은 한 마리도 잡아주길 청했다.

밤이 되어 부엉이를 찾은 자청비는 그 남은 한 마리의 부엉이가 정수남의 시체에서 생겨난 부엉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청비가 정수남의 원혼을 달래주자, 부엉이는 그대로 날아와 자청비의 품으로 안겼다.

일을 해결한 자청비는 사위가 되어 달라는 꽃밭지기의 청을 수락하고 막내딸과 서천꽃밭을 구경한다는 구실로 돌아다니면서 환생꽃을 따 소매 속에 감추었다. 그리곤 과거 시험을 보러 간다는 핑계로 빠져나온 자청비는 곧장 굴미굴산으로 가서 정수남의 시신에 살오를꽃, 피돌을꽃, 숨들일꽃을 놓아두고 때죽나무 막대기로 세 번 후려치며서러운 정수남아, 봄잠에서 깨어나라.’고 했다.

다시 환생한 정수남은 이전과는 다르게 공손하고 상냥하며 품행이 방정하였다. 그런데 자청비가 죽은 정수남을 다시 살려내어 집으로 데려오자, 김 대감이 이번엔 자청비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니 요망하다면서 쫓아버렸다.

 

이를 신화로 재구성해보자.

자청비의 행동으로 결국 가축도 죽고, 농사도 망쳐버렸다. 이에 인간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자청비는 정수남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다시 대지는 푸르러지고, 가축이 살게 되었다. 그러나 가축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많은 농경의 씨앗을 얻어야 하는 자청비다.

정수남은 자청비를 받아들였지만, 아버지가 농사를 망친 책임을 물어 자청비를 쫓아버렸다.

 

8. 마고할미를 만나다

 

집을 나선 자청비는 해동국을 이리 저리 헤매었다. 이집 저집 농사일을 도와 겨우 생계를 유지하며 떠돌던 어느 날, 외딴집에 이르렀다.

청태산 마고할미 집이었다. 마고할미의 옷을 짜는 솜씨는 매우 뛰어나 하늘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자청비는 마고할미의 수양딸이 되었다. 하루는 마고할미가 문도령이 장가갈 때 입을 옷을 만든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청비는 자신이 그 옷을 짜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옷 한쪽에가련하다 자청비, 불쌍하다 자청비를 몰래 새겨놓았다.

다음날 밧줄을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간 마고할미는 옷들을 건네주었다. 자기 옷을 받은 문도령은 한 귀퉁이에 새겨진 글귀를 보고 깜짝 놀라 마고할미에게 자청비에 대해 물었다. 사연을 듣고 문도령은 다음날 밤 찾아가겠다고 했다.

자청비는 기쁨에 들떠 옷을 곱게 차려입고 문도령을 기다렸다. 이윽고 다음날 밤이 되자 문도령이 왔다. 그런데 정말 자기가 사랑하는 자청비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방문 창호지에 구멍을 냈다. 자청비는 난데없는 손가락을 보고는 깜짝 놀라 바늘로 찔러버렸다. 깜짝 놀란 문도령은 그냥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렸다.

마고할미는 덜컥 화를 냈다.

이런 철없는 아이 같으니, 네가 이렇게 차분하지 못하고 말썽을 자꾸 피워서 집에서 쫓겨났구나. 너는 들어온 복을 방망이로 내치니 내 눈에 거슬린다. 그만 이집을 나가거라.”

결국 자청비는 이번에도 하릴없이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를 신화로 말해보자.

농경의 신이 되기 위해선 더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자청비는 마고할미에게 옷감을 짜는 기술을 익혔다. 그러나 자청비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9. 문도령을 만남

 

다시 정처 없이 길을 나선 자청비는어디로 가나?’생각 끝에 동관음 상주사를 찾아가 큰스님에게 조언을 구했다.

큰스님은 불가에 들어올 것을 제안했고, 자청비는 머리를 밀고, 고깔을 쓰고, 목탁을 들어 비구니가 되었다.

비구니가 된 자청비는 발길 닿는 대로 세상천지를 떠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산 속에서 하늘나라 궁녀(선녀)가 슬피 우는 것을 보았다.

문도령이 마음의 병을 얻었고 자청비와 목욕하던 물만이 그 병을 다스릴 수 있다는데, 대체 그 물이 어떤 물인지 알 수 없어서 울지요.”

그 물이라면 어디 있는지 내가 알지요.”

자청비는 선녀들을 주천강 연화못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하늘에 올라갈 때 함께 가겠다고 하였다.

하늘나라에 온 자청비는 문도령의 집을 찾아가 방위치를 확인했다. 밤이 깊어지고 보름달이 떠오르자 자청비는 별층당 맞은편 팽나무에 올라가 몸을 숨겼다. 문도령이 나와서 달을 보며 한숨지었다.

저기 저 달이 곱기는 하다만 지상에 있는 자청비만 못하구나.”

저기 저 달이 곱기는 하지만 내 사랑 문도령님만은 못하구나.”

깜짝 놀란 문도령이 나무를 살펴보니 자청비가 거기 있었다. 마침내 문도령과 자청비는 서로 얼싸안았다.

 

이를 신화로 얘기하면, 비로소 자청비가 농경의 신이 될 수 있는 시점에 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시련이 끝난 건 아니다.

 

10. 첫 번째 시험

 

한동안 자청비는 문도령의 방에 숨어살았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부모님에게 들키고 말았다.

자청비를 완강하게 반대하던 문도령의 어머니는 서수왕아기를 불러다 놓고 둘을 시험하겠다고 했다.

첫 번째 시험은 뜨겁게 달궈진 날선 칼 위를 건너가는 것이었다. 서수왕아기는 이 시험에서 건너기를 포기했다. 자청비는 옥황상제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를 하여 뜨겁게 달궈진 칼을 식히고 조심스럽게 건너갔다.

그러나 칼선다리에서 내려서다 자청비는 그만 발뒤꿈치를 베이고 말았다. 급히 치맛자락으로 가리고 문도령의 아버지 문선왕에게 둘러댔다.

인간 세상에서 여자는 한 달에 한 번 달거리를 하는 법입니다.”

자청비가 칼선다리에서 내려서다 피를 흘린 까닭에 이때부터 인간 세상 여자는 한 달에 한 번 달거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달거리를 해야만 아기를 낳을 수 있게 되었다.

 

이걸 신화적으로 풀이해보자.

너 출산을 할 수 있느냐?”

그럼요. 보셔요.”

자청비는 자랑스레 달거리를 한 흔적을 보여주었다. 자청비가 농경의 신이 될 수 있는 첫 번째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11. 두 번째 시험

 

문도령 어머니가 문도령과 문선왕의 옷을 지으라고 하였다. 자청비는 솜씨를 발휘하여 비단을 짜 옷을 지었다. 등허리엔 봉황을, 아랫단엔 연꽃을, 왼쪽 소맷자락에는 소나무를, 오른쪽엔 동백나무를 수놓았다.

자청비의 솜씨에 문도령 어머니는 자청비를 칭찬하였고, 온전한 하늘사람 대접을 받으며 살게 되었다.

한편, 문도령과의 혼인이 물거품이 된 서수왕아기는 화를 내면서 방안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드러누웠다. 며칠이 지나도 인기척이 없어 문을 열어보니, 서수왕아기 몸에서 새가 나왔는데, 머리에서 두통새, 눈에서 흘깃새, 코에서 악심새, 입에서 헤말림새가 나왔다.

그때 이후로 사이좋던 부부간에도 이 새가 들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혼례를 할 때 신부가 상을 받으면 숟가락을 들기 전에 이 새들 몫으로 음식을 조금씩 걷어서 상 밑에 내려놓는 풍습이 생겼다.

 

이것도 신화적으로 생각해보자.

자청비는 그해 직접 농사를 짓고, 옷도 만들며 농경의 신으로서의 활동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어느 곳에나 길흉이 함께 하는 법, 농경의 신으로서 경계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빈틈없이 수련을 거듭했다.

 

12. 문도령의 죽음

 

얼마 뒤, 자청비는 문도령과 함께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베를 짜면서 오순도순 살았다. 이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얼굴 고운 자청비를 탐내는 청년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하루는 그 청년들이 문도령을 잔칫집에 초대하였다. 자청비가 눈치를 채고 문도령 가슴에 솜을 넣어주며 술에 독이 들었으니 마시는척하며 흘리라 일렀다. 하지만 문도령은 술을 마셔버렸고, 말 등에 탄 채로 숨을 거뒀다.

말이 죽은 주인을 태우고 집에 돌아오자, 자청비는 죽은 문도령 눈썹 끝에 등에 한 마리를 매달고 방 안에 눕혀 놓고 태연하게 굴었다.

자청비를 데려가려고 뒤따라온 청년들은 방안에서 코고는 소리(등에가 날갯짓하는 소리)가 나자 기이하게 생각했다. 그래도 어떻게 수작이라도 걸어보려고 자청비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찌 감히 너희가 나를 데려가려 하느냐?”

자청비가 베틀 막대기로 후려치니 청년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버렸다.

 

이것도 신화적으로 풀어보자.

농경의 신은 다산과 풍요다. 많은 씨앗들이 대지에 뿌리를 내리려고 할 것은 당연하다. 문도령의 죽음은 자청비가 많은 씨앗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열린 공간이다.

 

13. 문도령의 부활

 

자청비는 서둘러 서천꽃밭으로 향하였다. 꽃밭지기 막내딸을 만난 자청비는 또 막내딸을 속이고 환생꽃을 소매에 숨겼다.

과거에서 낙방을 하였으니 이젠 나를 믿지 말고 기다리지도 마시오.”

한 달에 한번이라도 좋으니 꼭 돌아와요.”

막내딸은 향나무 얼레빗 반쪽을 정표로 주며 울었다.

낭군님아, 낭군님아. 봄잠에서 깨어나라.”

집으로 돌아온 자청비는 정수남에게 하듯 문도령을 다시 살려내었다.

 

이것도 신화적으로 풀어보자.

그러나 자청비는 문도령이 필요했다. 혼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 것이다.

 

14. 문도령에게 실망한 자청비

 

하루는 자청비가 서천꽃밭지기 막내딸이 생각나서 문도령에게 얼레빗 반쪽을 주며 얘기했다.

예전에 여자의 몸으로 서천꽃밭 막내따님에게 장가를 든 적이 있습니다. 막내따님이 나를 기다리며 홀로 외롭게 지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낭군님께서 나 대신 가 주십시오. 다만 서천꽃밭에서는 보름까지 살고, 돌아와 그믐까지는 저와 함께 사십시오.”

문도령은 자청비의 부탁대로 서천꽃밭에 와서 막내따님과 사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꽃밭구경에 넋이 팔려 내리 3년이 지나가버렸다.

문도령을 기다리다 지친 자청비는 제비 날개에 편지 한 장을 끼워 문도령에게 보냈다.

문국성 문도령은 어찌 이리 무심할까? 보름 살고 돌아오라 그리 당부하였건만, 연 삼 년이 되도록 소식 한 장이 없구나.’

겁이 난 문도령은 허겁지겁 말에 올라타서 집으로 향했는데, 어찌나 서둘러 탔는지 말을 거꾸로 타고 달려갔다.

내가 얼마나 보기 싫으면 말을 거꾸로 타고 오는가?”

자청비는 문을 걸어 잠그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 문선왕에게 더 이상 문도령과 살 수 없다 하였다.

 

이도 신화적으로 생각해보자.

꽃밭지기 막내딸과 동성 결혼을 한 자청비다. 그런데 그녀를 기만했으니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봐서 잘 아는 남자, 문도령을 보내 준 것이다. 농경과 목축, 그리고 꽃과 약초도 필요한 세상이다. 그런데 문도령이 그 꽃과 약초(꽃밭지기 막내딸)에 푹 빠져 농경과 목축을 돌보지 않으니, 자청비는 화가 났다.

 

15. 농사의 신이 된 자청비

 

너는 죽은 것을 살리는 능력을 지녔구나. 오곡 씨를 가지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서 농사를 다스리며 살아라.”

문선왕은 자청비에게 콩, , 녹두, 동부, 메밀 등 오곡 씨를 주었다. 오곡씨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자청비는 부모님과 눈물의 재회를 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종자를 가져왔으니, 그 오곡을 다스리며 살겠다고 하였다.

말과 소를 잘 다루는 정수남이를 데려가라.”

김 대감의 말에 오매불망 자청비를 그리워하던 정수남의 소원도 이루어졌다.

자청비는 정수남에게 가져온 오곡 씨를 주어 농사를 짓게 하였다.

자청비는 밭마다 돌아다니며 좋은 씨를 골라주고, 정수남은 소로 밭을 가는 법을 가르쳤다. 그런데 자청비가 씨앗들을 전할 때 메밀 씨를 늦게 전하는 바람에 메밀은 다른 곡식보다 늦게 심고,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또 흔히 농부들이 참을 들기 전에 첫 숟가락을 떠서고시래하며 들판에 뿌리는 것은 자청비에게 풍년을 부탁하는 거라고 한다.

아무튼 그때부터 소출이 증가하여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일이 수월해졌다. 한편, 뒤늦게 하늘로 올라간 문도령은 부모님을 찾아가 통사정을 하였다.

앞으로 너는 농사를 다스리는 자청비를 도와라.”

문성왕은 문도령을 비를 내리는 기후의 신으로 좌정시켰다.

비가 오지 않으면 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내는 것은 바로 문도령에게 비를 내려 달라고 비는 것이다

이리하여 문도령은 기후신, 자청비는 농경신, 정수남은 가축신이 된 것이다.

 

이를 신화적으로 정리해보자.

마침내 기후신, 농경신, 목축신이 하나가 되었다. 더 이상 네 것 내 것을 따질 필요가 없었다. 정수남은 꿈에도 그리던 자청비와 한 이불을 덮게 됐으니 더 이상 뭘 바라랴? 문도령도 꽃 같은 꽃밭지기 막내딸이 있으니,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자청비는 생산과 풍요의 신이니 상대가 누구면 어쩌랴? 좋은 씨앗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 후손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 아니겠느냐?

사랑의 여신, 풍요와 다산의 여신 자청비 할머니가 그저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