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형체를 만들다
(1) 실달성과 허달성
세상이 열리기 전, 어둠이 혼자 있었다.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르며 그 어둠이 조금씩 흔들렸다. 안개 흐르듯 무겁고 짙은 어둠과, 가볍고 옅은 어둠으로 균형이 깨졌다.
또 세상이 열리기 전, 빛이 생겼다. 어느 순간 그 빛이 대폭발을 일으키며 균형이 무너진 어둠을 가르고 찢었다. 크고 작은 별들이 생기고, 그 별들이 모여 작은 우주가 되고 작은 우주가 모여 큰 우주를 이루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양계 우주에서 여덟 가지의 소리가 생겼다. 태양의 무겁고 높은 소리, 수성의 오르락내리락 소리, 금성의 강하고 짧은 쇳소리, 화성의 부드러운 소리, 목성의 상쾌한 소리, 토성의 편안한 소리, 천왕성의 넉넉한 소리, 해왕성의 잔잔한 물결 소리였다.
태초의 소리였다. 그 소리가 느낌을 만들어 냈다. 그러자 어둠과 빛이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 느낌은 또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게 또 얼마인지 모를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창조자야. 이 세상을 담을 그릇을 만들어야 해.’
어느 날, 태초의 빛은 세상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빛 무리들을 불러 세웠다.
“자, 모두들 잠시 멈추어 생각을 하자.”
“왜 그러십니까? 태초의 빛이시여!”
빛 덩어리를 나누고 모으면서 세상의 끝으로 달려가던 빛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 세상을 담을 그릇을 만들어야 해. 그러니 힘을 모아줘.”
“그 그릇이 무엇입니까?”
“그 그릇은 생각을 담는 거야.”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요?”
“앞으로 이 세상에는 많은 생각들이 살게 될 거야. 우린 그 그릇을 만들어야 해.”
“알았습니다. 태초의 빛님! 그런데 그 그릇을 어떻게 만들지요?”
“생각은 느낌에서 나왔어. 그러니 모두들 그 느낌을 모으자.”
“느낌이요?”
“그래, 지금부터 우린 각자의 느낌을 생각하자. 그리고 그 생각을 모으는 거야.”
세상의 끝을 향해 달려가던 빛들은 생각을 모으기 시작했다. 어떤 빛은 자신에게서 떨어져간 작은 빛을 떠올렸다. 그 작은 빛을 다시는 못 본다고 생각하니 슬펐다. 그래서 슬픔을 생각했다.
어떤 빛은 자신의 몸을 나누어 수많은 작은 빛을 만들었다는 게 무척 기뻤다. 그래서 기쁨을 생각했다.
또 어떤 빛은 자신의 몸을 떠나가는 작은 빛을 바라보며,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 빛은 아름다움을 생각했다.
또 어떤 빛은 용기를, 어떤 빛은 희망을 생각했다. 또 어떤 빛은 낙망을, 어떤 빛은 두려움을 생각했다. 그리움, 기다림, 가벼움, 무거움, 더러운 느낌 등 많은 생각들이 또 더 있었다.
그 생각들은 서로를 받아들였다. 슬픈 생각에는 기쁜 생각이 다가갔다. 낙망에는 희망의 생각이 다가갔다. 더러운 생각에는 아름다운 생각이 다가갔다. 그렇게 서로를 어루만지고 배려하고 받아들였다. 빛들의 생각은 더 뜨거워졌다. 그 빛들이 둥글게 회오리치며 한데 뒤엉켜 더욱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자 그 가운데에서 엄청난 힘이 생겼다. 그 힘은 불기둥으로 바뀌어 높이를 알 수 없는 크기로 용솟음쳐 올랐다. 그걸 보며 빛들은 놀랐다. 모두들 자신도 함께 폭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이었다. 빛들은 모두 눈을 감았다. 마침내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잠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대로 정지하고 말았다.
그리고 또 얼마쯤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빛들은 정신을 가다듬고 그 불기둥이 용솟음쳐 올랐던 자리를 살펴보았다. 그 엄청난 빛의 섬광이 있었던 자리에 무엇이 보였다. 어떤 형체가 있었다.
“저게 무엇입니까? 태초의 빛님!”
“바로 그릇이다. 우리들의 생각이 만들어 낸 그릇이다.”
“저 그릇은 무슨 일을 하지요?”
“그건 저 그릇이 알아서 할 일이야. 우린 우리의 몫을 다했어. 우린 느꼈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 생각을 모아 그릇을 만들었지. 이제부터는 저 그릇이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가겠지.”
“우린 이제 가도 됩니까?”
“그래, 수고들 했어. 이제 저 그릇에게 맡겨놓고 우린 떠나자.”
빛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모아 만든 그릇을 남겨놓고 다시 세상의 끝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맨 처음 이 세상에 형체를 나타낸 그릇은 실달성이었다. 하지만 실달성은 아직 조용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엔 태초의 어둠이 생각했다. 빛이 만든 엄청난 불기둥을 보면서 어둠들은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무언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잃은 듯 슬프고 괴로웠다. 무겁고 짙은 어둠, 가볍고 옅은 어둠, 갈기갈기 갈라지고 찢겨진 어둠 등 그동안 빛을 받아들이며 온갖 형태로 이지러진 어둠들이 느낌을 모았다.
“태초의 어둠이시여! 우린 어찌해야 합니까?”
“우리도 느낌을 모으자. 지금의 느낌을 생각으로 모으자.”
태초의 어둠과 여러 어둠들이 생각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생각이 한데 엉키기 시작했다. 서로를 받아들이며 감응하였다. 슬픈 생각에는 기쁨이, 절망과 낙망에는 용기와 희망이, 고요함에는 번뇌가 다가갔다. 무거움에는 가벼움이, 용서에는 질투와 시기가 달라붙었다.
그러자, 그 생각들이 한데 어울려 세찬 회오리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건 뜨거움이 아니었다. 불덩이도 곧바로 얼려버릴 차가움이었다. 그 차가운 회오리는 이내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얼음기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얼음기둥은 위로 용솟음치지 않고 엄청난 무게와 힘으로 아래쪽으로 꺼져 내렸다.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함께 빨려 들어갈 듯 큰 충격이 뒤따랐다. 그리고 크기와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가 생겼다. 어둠들은 마치 자신들도 그 구덩이 속으로 쏠려들어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참 뒤, 얼음기둥이 만든 구덩이 자리에 어떤 형체가 있었다.
“저게 뭐지요? 태초의 어둠님!”
“저건 그릇이란다. 우리의 생각이 모아진 그릇이야.”
“저, 그릇이 무슨 일을 하지요?”
“그건 아무도 모른다. 이제 저 그릇이 알아서 할 일이야.”
그 때 어둠들이 만든 그릇은 허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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