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사 기행>
보석을 얻었다
난데없이 눈앞에 보석이 나타난다면
그걸 가질 수 없다 해도 행운임에 틀림없다.
개천사(開天寺) 행이 그러했다.
말 그대로 하늘을 여는 절집이니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마음 속 심란함을 씻어버리려 들렸는데, 그곳이 바로 보석 곳간이었다.
2014년 4월 11일 화순군 춘양면 가동리에 있는 개천사로 들어섰다.
신라 헌덕왕 말기(809∼825년) 도의선사가 장흥 보림사에 이어 개천사를 창건했다 하고,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나그네에게 그건 그저 기록일 뿐이다.
아무튼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복구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용화사(龍華寺)라 불렸다고도 한다. 이어 천불전 등이 한국전쟁(1950)으로 소실되었는데 주지 김태봉(1963)이 주민들의 협조로 대웅전과 요사체까지 중건하였다 한다.
그렇게 역사는 길어도 절집 건축연대는 가까워서 비교적 단정해 보이는 대웅전, 천불전, 요사체가 덩그마니 아름다운 풍광을 거느리고 나그네를 맞이해주었다.
먼저 하얀 털의 진돗개가 꼬릴 흔들며 반긴다. 이 녀석이 이를 드러내고 짖어대면 어쩌나 했는데 ‘심심한데 잘 왔다’는 표정이다.
‘그래 뇬석! 너 참 영리하다. 난 쥐나 달구 종자가 아니다.’
사람을 알아보는 녀석에게 칭찬 한 마디 해주고 잠시 산천을 둘러본다.
새 봄의 산자락에 짙은 청색 보석으로 박혀있는 비자나무가 눈에 띈다. 그리고 볼라벤에 자빠졌는지 모르나, 그 자빠진 모습이 오히려 멋들어진 홍도가 눈을 붙잡는다.
이어 역시 비스듬히 누운 2백 살이 넘었다는 단풍나무를 오래 바라본다.
이어 숲 쪽 풀밭으로 가 손을 내미는 풀꽃들과 다시 눈 맞춤을 한다.
실은 이곳 개천사를 오게 된 것은 노루귀꽃과 비자나무 때문이다. 그 앙증맞은 노루귀꽃과 비자향에 취해보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제 철이 지났나 보다. 노루귀꽃은 안 보이고 역시 제 철을 보내버린 봄맞이꽃 몇 송이가 시들어가는 대궁이에서 바람을 흔들고 있었다.
‘그래, 네가 날 바람맞힌 봄바람꽃이다. 오늘부터 넌 내게 봄바람꽃이다.’
봄맞이꽃에 이름을 불러주고 주변을 둘러보다 분홍색 금창초를 발견했다. ‘으싸!’ 하는 마음에 절로 어깨가 올라간다.
헌데 자주꽃이 아닌 이 분홍꽃은 금창초가 아닌 내장 금란초라고 한다. 모르면 배워야 한다. 보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보게 된다하지 않던가?
그 분홍 내장 금란초 한 뿌리를 캐어 소중히 종이컵에 담는다.
지난 겨울에 나그네 사무실의 화분 두 개가 고사해버렸다. 추운데다 물도 주지 않았으니 이 나그네의 큰 죄다.
그래서 오늘 이 내장 금란초는 나그네 사무실의 그 빈 화분에 심을 생각이다. 비록 이 내장 금란초가 길가, 밭둑, 담벼락 틈에서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흔한디 흔한 잡초긴 하지만, 오늘부터 이 나그네에겐 아리따운 분홍 아가씨다.
‘이 내장 금란초는 오늘부터 분홍아가씨꽃이다.’
아직 꽃잎을 다 바람에 주지 않은 벚꽃 길을 걸어 내려오며 나그네는 뜻하지 않은 봄 보석에 마음이 흐뭇하다.
하늘을 연 곳에서 꽃 보석을 얻었으니, 흘러가는 봄이 아름답기만 하다.
(귀양 한달만에 사약을 받고 숨진 조광조 선생 귀양지 처소. 개천사 가는 길에 능주에 잠깐 들렸다)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
(개천산 아래 개천사)
(개천사)
(홍도)
(천불전)
(단풍나무)
(대웅전)
(봄바람을 맞힌 봄맞이꽃)
(금창초)
(분홍빛 내장 금란초)
(다시 능주에 들려 영벽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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