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4일, 진정한 광복도 아닌 광복절이 하루 앞이다.
이번 여행의 목적인 상해임시정부청사와 홍구 공원의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둘러보는 날이다.
친일파는 독재자가 되고, 그 독재자는 갑을 낳아, 대대손손 백성의 고혈과 기름으로 호의호식 잘 살지만, 독립군의 후손 대부분은 삼대를 거지같이 사는 나라가 한국이다.
대표적인 예로 부하의 총에 죽은 왜명 다까기 마사오, 박정희가 있다. 오까모도 미노루이기도 한 그는 2백여 명의 여인들을 궁정동으로 불러들이며 잘 살았고, 죽은 뒤에는 국민의 세금 2백여 억 원으로 기념관까지 지었다.
하지만 일이 참 또 우습다. 윤봉길 의사 손녀 윤주경은 박근혜를 지지하고 김구 손녀 김미 역시 새누리당을 지지하며 무슨 허울 좋은 감투도 썼다고 하니, 이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체육, 언론, 망둥어에 꼴뚜기, 그리고 송해와 이미자 등 딴따라패들까지 합세해 온 산천이 쓰레기들로 냄새를 풍긴다. 명박이의 4대강이 녹조똥물로 변하는 걸 탓하지 말아야 할 세상이다.
그러니 상해임시정부청사와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관람객의 입장료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건 당연지사, 국격 좋아하는 명박이나 근혜의 수치가 아니라 51,6%의 인간들과 헤헤거리고 살아야 하는 우리 민초들의 수치이기도 하다. 더런 놈의 나라꼴을 생각지 않으려하지만, 허름한 뒷골목의 임시정부 청사와, 묘지기집 변소보다 더 허름한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둘러보며 부끄럽고 슬프기보다 쥐나 달구똥처럼 높은 국격을 재확인한 셈이다.
1932년 4월 29일 일본군은 일왕의 생일축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전쟁 승리 두 가지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가졌다.
윤 의사는 폭탄 2개(저격용 물통 폭탄 1개, 자결용 도시락 폭탄 1개)를 감추고 식장에 입장하였다.
식이 한창일 때 수류탄을 던졌다. 시라카와 대장과 거류민단장 가와바다는 즉사,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 자결하러 가지고 간 폭탄이 터지지 않았다. 윤 의사는 체포되었고,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32. 11. 20.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으로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다음은 윤 의사가 아들 종에게 남긴 유서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그럼에도 이제 윤봉길 의사, 김구 선생 등 독립운동가의 후손들도 친일파와 손잡고 희희낙락거리는 세상이 되었다. 호랑이가 고양이도 아니고 쥐새끼를 낳고, 고래가 피라미를 낳는 세상이 된 것이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그렇게 헝클어진 마음을 달래고 홍구공원,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진 그 지점에 서서 폭탄 한 개를 힘껏 던져본다.
다음에 생이 있다면 중국쯤에서 태어났음 싶다. 허망한 꿈으로 싱겁게 웃고 비행기에 오르니 1시간 반 뒤에 인천공항이다.
그저 반갑지도 않은 산하, 된장국과 마늘에 삼겹살 생각하며 염천의 나그네 여행을 마무리한다.
<상해 임시정부 유적지>
<왼쪽 골목길로 들어가면...>
<무슨 교도소 건물도 아니고...>
<누구를 위해 독립운동을 했을까?>
<상해 홍구공원의 윤봉길 의사 기념관 표지석>
<기념관>
<윤 의사가 폭탄을 던지려고 섰던 자리>
<왜군 기념식장 자리>
<상해 남포대교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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