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밖 여행기

이집트, 그리스, 터키 여행기 27

운당 2008. 5. 29. 05:17

24. 성 요한 교회, 셀축 성-1월 24일 오후

 

고대에는 에게해가 이 에페소에서 가까웠는데, 그동안 토사가 밀려 항구는 그 기능을 상실하고 해안선도 멀어졌다고 한다. 그날의 영화가 어떠했을지? 가늠하며 그날의 에페소 시민들처럼 항구로 내려가는 길을 잠시 걸어본 뒤, 이제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셀축시로 나왔다.

도자기를 제작하고 판매하는 식당에서 닭고기, 도마도 스프, 올리브기름 셀러드로 점심을 먹고 나오니 바로 그 옆이 기차박물관이었다. 잠시 그곳을 둘러보고, 양 15마리의 뱃가죽으로 만드는 등 터키 최고 품질의 가죽 제품을 만든다는 가죽옷 상점에도 들렸다.

다시 서둘러 들린 곳은 성 요한 교회였다. 6세기경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 지어져 성 요한에게 바쳐진 교회라고 했다. 입구는 통곡의 벽이라고 했는데, 기독교 탄압의 역사가 남긴 흔적이었다. 기독교 탄압이 시작되고 교회에는 십자가 대신 우상이 세워졌는데, 다시 기독교가 공인을 받게 되어 그 우상을 부순 뒤 벽을 쌓고 통곡의 벽이라고 했다 한다.

이곳은 사도 바울의 전도가 있었던 곳이어서, 그 뒤를 이은 성 요한이(요한복음와 요한계시록 등을 남긴, 예수의 제자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았던) 성모 마리아와 함께 말년을 보낸 곳이라고 한다.

처음 4세기 경 사도 요한의 무덤 위에 나무로 교회가 지어졌고, 이후 비잔틴 시대에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다시 개축을 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 역시 지난날의 화려했던 영광을 세월에 묻은 채, 나그네에게 그 폐허의 잔해를 온 몸으로 드러내 보이며, 역사의 엄중함과 무상함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요한 바오르 2세의 성지 선포 현판, 목조로 된 현금 보관소, 시신을 넣은 관을 올려놓고 예배를 드렸다는 네 개의 기둥, 세례의식이 있었다는 침례소, 6세기경의 교회 모형 등을 둘러본 뒤, 뒤쪽에 있는 셀축성은 사진에만 담고 되돌아 나왔다.

폐허의 돌담, 곧 무너질 듯한 돌기둥에서 아이들이 뛰어 놀다가 그만 한 아이가 헛발을 딛고 쓰러졌다. 다른 아이들이 둘러싸고 걱정스런 얼굴을 한다.

괜찮아? 그런 뜻으로 손을 흔들어주고는 성 요한 교회와도 작별을 했다.

 <에페소에서 항구 가는 길, 로마의 황제들이 세워놓은 이정표 돌 앞에서 에페소와도 이별을 했다>

 <에페소에서 셀축시로 나왔다. 셀축은 도자기의 산지라고도 했다>

 <셀축시의 기차박물관>

 <기차 박물관, 산모롱이 돌아가는 저 기차에 누가 타고갈까?>

 <가죽옷 판매장에 들렸는데 패션쇼를 먼저 보여준다>

 <판매장의 모습, 세계 최고의 품질이라고 자랑한다>

 <성요한 교회, 통곡의 벽이라고 한다. 휴전선이 있는 우리 한국인에게 통곡의 벽은 남의 일이 아니다>

 <요한 교회가 초기에는 목재로 지어졌다고 한다. 현 모습은 6세기에 개축된 잔해이다.>

 <지금은 기둥과 벽의 일부만 남아있다>

 <기와집은 초기 4세기의 건축물이며 현금보관소이고, 뒤의 성은 셀축성이다>

 <요한의 무덤이 있는 장소이고, 터키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한 아이가 넘어져 다쳤다>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다녀간 기념표지석이다>

 <돌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역사의 무게>

 <동 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은 무엇인가를 남겨놓아야만 했다>

 <현금 보관소라고 했다. 지금은 없지만.>

 <네 기둥 위에 관을 올려놓았다고 했다>

 <세례식을 거행하던 장소다>

 <요한 교회의 잔해와 셀축시>

 <6세기에 개축된 요한 교회의 모습>

 <셀축성인데 비개방이어서 들려보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