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로 내몰린 노숙자 - 나도 땅투기도 하고, 운하에서 희희덕 거리며 뱃놀이를 즐기고 싶은데>
<꿈 깨셔. 안 죽으면 다행이여. 있는 놈들이 더 무서워. 나 태안의 뿔논병아리여. 내가 누구땜시, 멋땜시, 죽은줄 아남?>
<소설>
학원이 신세
<1>
학원이는 사람 이름이다. 그리고 조선이 왜국의 식민지였을 때, 1930년을 앞뒤로 한 무렵에 있었던 사실에 기초한 실존인물이다.
1930년 당시 학원이의 나이는 25살쯤이었는데, 홀어머니와 함께 겨우 눈비나 가리는 똑다리 밑 움막집에서 살고 있었다. 다리벽을 의지해 두 귀퉁이에 말뚝을 박고 돌과 흙을 이겨 담을 두른 뒤, 바람을 막아주는 문을 하나 달았다. 그런데 그 문이라는 것도 나무가 아닌 너덜너덜 헤어진 지푸라기로 만든 가마니였고, 덮고 자는 이부자리라는 것도 풀을 엮어서 만든 냄새 풀풀 나는 조각난 거적대기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비렁뱅이 거지 집이었다.
그래도 그 똑다리 밑 학원이네 움막은 비바람, 눈보라를 막아주어서 그럭저럭 살만했는데 여름철 우기가 문제였다. 태풍이라도 분다든지, 장마가 지면 찰랑찰랑 불어난 물이 똑다리 난간까지 넘실넘실 차올랐다.
“간밤에 학원이 집 안 떠내려갔는가 몰라.”
큰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주막에 앉아 그런 실없는 소릴 했다. 사실 학원이네를 걱정하느라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술안주도 변변찮다 보니, 괜스레 술안주 삼아 그렇게 학원이네 움막 얘기를 하며 실실 웃기도 하고, 등 따시고 배부른 자신의 처지를 은근히 과시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사람들의 걱정대로 비바람, 폭우에 학원이네 움막이 떠내려가긴 했지만, 비가 오면 똑다리 옆 방앗간, 또 그 방앗간 옆 산비탈 굴막으로 학원이네는 거처를 옮겼다. 그러니 최소한 학원이 모자의 생명에 대한 지장은 없었다.
비바람이 그치고 볕이 나면 학원이는 다시 똑다리 밑에 움막을 지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움막이라는 게 나무 기둥 두어 개에 가마니와 거적대기만 있으면 되었으니, 뚝딱뚝딱 학원이네 움막을 새로 짓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학원이는 부득불 그 똑다리 밑에서 살려고 아등바등 움막 짓는 일을 해마다 되풀이 했을까?
그 이유는 뭐 어려운 과제풀이가 아니다. 그 똑다리는 인근 10여개 마을 사람들이 읍내 장으로 가려면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리였다. 더하여 이웃 지역과 학원이가 사는 지역을 오가는 가장 큰 길에 걸린 다리였다. 되풀이 설명하자면 학원이가 사는 지역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큰 다리였다.
그러다보니 자연 사람과 우마차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 또 똑다리 가까운 곳에 제법 규모가 큰 색주가도 서너 채 있었다. 그 색주가에는 질질 끌리는 치맛자락을 허벅지 위까지 감아올리며 숟가락, 젓가락으로 상다리 두들겨 흥을 돋우는 색시들도 있어서, 잠시 쉬어가는 나그네는 물론이려니와 술꾼이며 노름꾼들이 마른침 삼켜가며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러니 학원이 같은 비렁뱅이 거지가 살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술꾼들 심부름도 해주고,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동정심에 기대어 입에 풀칠하고 살아가기에 그 똑다리 밑 움막만한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비렁뱅이 거지 모습이지만 자세히 쳐다보면 학원이는 알맞은 체구에 제법 반듯한 이목구비를 갖추었다. 다만 두 눈이 뱀눈처럼 반질반질 빛나는 게 교활해 보이고, 윗입술을 들추고 나온 뻐드렁니 두 개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