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이 무엇이냐? 정유재란(1597) 대책을 논하며 도요도미히데요시는 궁금했다. 왜는 성주가 항복하면 백성들도 복종했기에 의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선 각처의 방백을 죽이고, 심지어 왕이 도망갔는데도 들불처럼 일어나는 의병은 이해불가였고, 뒤가 늘 불안하고 두려웠다. 당시 곽재우와 의병총대장 김덕령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남쪽전선은 왜와 의병의 전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나라가 위기일 때 농민, 어민, 노비, 중인, 사림, 퇴직 관료, 장병 등 다양한 계층을 조직적이고 전략적으로 움직인 것은 ‘의병청’이었다. 화순 만연산에서 흘러온 만연천과 삼천이 만든 삼천리(화순읍 상삼2길 31)의 의병청지(址)는 호남 의병군을 이끌었던 역사의 터이고 금산, 진주 전투 등의 승전 토대가 된 곳이다.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