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이 무엇이냐? 정유재란(1597) 대책을 논하며 도요도미히데요시는 궁금했다. 왜는 성주가 항복하면 백성들도 복종했기에 의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선 각처의 방백을 죽이고, 심지어 왕이 도망갔는데도 들불처럼 일어나는 의병은 이해불가였고, 뒤가 늘 불안하고 두려웠다.
당시 곽재우와 의병총대장 김덕령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남쪽전선은 왜와 의병의 전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나라가 위기일 때 농민, 어민, 노비, 중인, 사림, 퇴직 관료, 장병 등 다양한 계층을 조직적이고 전략적으로 움직인 것은 ‘의병청’이었다.
화순 만연산에서 흘러온 만연천과 삼천이 만든 삼천리(화순읍 상삼2길 31)의 의병청지(址)는 호남 의병군을 이끌었던 역사의 터이고 금산, 진주 전투 등의 승전 토대가 된 곳이다. 여기 의병청지는 해주 최씨인 최경운, 최경장, 최경회 삼형제가 주역이다. 임진왜란에 삼형제는 의병청을 설치하고 병사, 전마, 군량을 모았다. 최경운의 아들 최홍재는 의병을 이끌고 금산전투에 참여했다. 최경회는 금산전투에 참여했던 의병을 이끌고 전북 장수로 나아가 왜를 무찔렀다. 무주 우지치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 후꾸시마 마사나리를 활로 쏘아 죽이고 ‘언월도’를 노획했다. 이 언월도는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오동나무꽃 문장이 새겨진 보물급 칼이다. 또 이때 왜장의 품에서 공민왕이 그린 ‘청산백운도’와 ‘고려청자’까지 되찾았다.
또 최경회는 진주성에서 왜를 공포에 떨게 했다. 하지만 1593년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천일, 황진, 고종후 등과 함께 9일 밤낮을 싸우다 순절하였다. 이때 최경회를 따라 종군하던 주논개는 남편의 순절에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남강으로 유인하여 투신 순절하였다. 선조는 최경회의 형인 최경장을 ‘계의병대장(繼義兵大將)’으로 임명하였다. 장남인 최경운은 5백여 의병을 이끌고 화순의 오성산성을 지키다 1597년 순절했다. 1782년 정조 임금의 명으로 화순 현감이 올린 ‘오성산최경운전망유허도(烏城山崔慶雲戰亡遺墟圖)’가 그때의 기록이다.
이들 해주 최씨 삼형제와 의병청지를 기리는 곳이 의병청지인 고사정이다. 이 고사정은 1678년(숙중 4)에 삼형제의 둘째인 최경장의 아들로 칠곡도호부사였던 최후헌이 지었다 하며, 고사정 보수 때 최경장의 아들 최홍우의 상량문 글씨가 있었다. 이 고사정은 선조의 남쪽 고을 높은 선비라는 뜻의 ‘남주고사(南州高士)’에서 유래하니 후손이 아니더라도 눈물겨운 역사와의 만남이다. 여기에 수령 2백여 년의 회화나무가 있다. 이 회화나무는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가 나오며 잡귀신이 범접을 못 한다는 길상목(吉祥木)으로 임금이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이다. 왜의 헌병이 ‘언월도’를 내놓으라고 최씨 가문의 종손 상투를 회화나무 가지에 묶어놓고 사흘을 고문했다. 하나 종손은 꿋꿋이 버티며 끝내주지 않았다. 그런데 6·25 때 경찰이 언월도와 청산백운도, 고려청자를 가져갔다. 언월도가 불법무기라는 명목이었고. 이 언월도를 경찰서 난로의 조개탄 쑤시개로까지 썼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으로 언월도는 되찾았으나, 청산백운도와 고려청자의 행방은 지금도 알 수 없다. 또 여기 고사정 앞에 수천 명 의병이 마시던 우물이 있다. 당시 세 개였으나 지금은 하나만 남았다. 이 세 우물은 최경운 의병대장의 호이자, 이곳 삼천리의 지명이다. 또 여기 고사정은 최경장의 후손이 지키고 있다.
‘상투를 묶었던 가지는 아버님이 보기 싫다고 잘라 버렸지요.’
최현신 종손의 말에 다시 올려다보는 회화나무에 햇살이 빛나고 흰구름 한 조각이 걸려있다. 어찌 도요토미히데요시 같은 졸렬한 자들이 조선 선비의 기개와 의기를 깨닫으랴? 최경운, 최경장, 최경회 세 분이 이끈 의병청의 의기가 문득 삼천의 샘물로 솟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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