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8m의 설악산은 8월 한가위에 내린 눈이 이듬해 하지에 이르러서야 녹는다고 설산, 설봉산, 설화산이라고도 불렀다.
이곳에 자리 잡은 신흥사는 천년고찰이다. 자장율사가 신라 진덕여왕 6년(652)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넣은 9층 탑을 세워 향성사라 했다. 효소왕 10년인 701년 절이 소실되면서 9층 탑도 6층이 되었는데, 임진왜란에 파괴되어 3층만 남았다. 향성사가 불탄 뒤 의상이 절터를 천여m 옮겨 세워 선정사라 하였는데, 조선 인조 20년(1642)에 다시 화마를 입어 폐허가 되었다. 이때 운서, 혜원, 연옥 세 스님이 백발신인이 새 절터를 점지하는 똑같은 꿈을 꾸고, 1644년 지금의 터에 중건하여 신(神)이 점지했다는 신흥사라 했다. 1995년에 앞글자를 신(新)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영동지역 불교를 새로 부흥한다는 염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남부에서 3번째로 높은 설악산의 대청봉을 중심으로 북쪽 미시령과 남쪽 점봉산을 잇는 능선을 경계로 동쪽을 외설악, 서쪽을 내설악이라 한다. 또 북동쪽 화채봉과 서쪽 귀떼기청을 잇는 능선을 경계로 남쪽은 남설악, 북쪽은 북설악이라 한다.
내설악에 백담사, 수렴동계곡, 대승폭포, 와룡폭포, 옥녀탕 등이 있고, 외설악에는 울산바위, 흔들바위, 비선대, 비룡폭포, 신흥사 등이 있다. 한 발 건너 첨봉이고 암벽을 흐르는 물은 폭포와 소를 이루어 계곡이니 북쪽 금강산과 설악산은 형님 아우이다.
신흥사에는 창건 당시 주조한 1400여 년의 범종과 조선 순조가 하사한 청동시루가 있다. 보물인 극락보전과 향성사지 3층 석탑, 1651년 조각승 무염의 목조아미타삼존좌상과 목조지장보살삼존상, 한글, 한자, 범어로 새긴 경판, 보제루와 명부전, 조사전, 삼성각 등이 있다.
1951년 5월 7일이다. 오전 6시에 설악산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군은 산을 올라가야 했고, 제12사단 소속 북한군은 높은 곳에서 경기관총을 쏘고 방망이 수류탄을 굴러내렸다.
그렇게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중 5월 11일, 빗발치는 적탄을 무릅쓰고 목표 고지에 첫발을 디딘 김동희 소위가 저격병의 총탄에 전사하였다.
다음 날 마침내 설악산이 아군 수중에 들어왔다. 아군도 상당수 희생하였지만, 적 사살 1,140명에 각종 포 24문과 소화기 67정을 노획하는 동부전선 첫 승리였다.
그해 겨울이다. 설악산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신흥사를 나온 아군이 마등령을 넘을 때였다. 정상을 눈앞에 둔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굽은 능선을 넘던 병사 하나가 발을 헛디디고 미끄러져 1천여m 계곡 아래로 떨어졌다. 눈 깜짝할 순간에 병사를 삼킨 눈 쌓인 계곡에서는 칼날처럼 아픈 바람 소리만 들렸다.
1960년대 말쯤이다. 이곳 마등령 계곡 아래에서 녹슨 철모와 Ml 소총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거꾸로 꽂힌 Ml 소총에 철모를 씌운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의 주인공인 그 병사는 바람 속으로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린 뒤였다.
이곳 설악산의 아름드리 금강송과 전나무 등은 산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다. 한 그루, 한 그루 세월과 역사를 켜켜이 쌓으며 서 있다. 그중 신흥사 들머리 통일대불 옆 금강송의 푸른 가지가 2층이다. 위, 아래에서 펼친 가지가 마치 우산인 듯, 어미 닭의 날개인 듯 세월과 역사를 품고 있다. 두 그루처럼 보이지만, 한 그루인 그 금강송을 올려다보며 생각한다,
통일은 둘로 나뉜 지도의 땅을 합치는 것이 아니다. 헤어진 가족, 실향민은 물론, 7천만 겨레를 적과 아군이라 편 가름 없이 함께 보듬는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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