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년인 1801년 음력으로 11월 5일이다. 자산어보를 쓴 마흔셋의 정약전과 목민심서를 쓴 서른아홉의 정약용이 유배길에 올랐다. 의금부를 나와 숭례문을 지나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동작진, 남태령을 지나 과천에서 첫 밤을 맞았다. 이튿날은 수원, 사흗날은 진위현, 나흗날은 직산현, 닷샛날은 천안, 엿샛날은 광정, 이렛날은 공주목, 여드렛날은 계룡, 아흐렛날은 부적, 열흘째에 여산, 열하루에 이서, 열이틀에 원평, 열사흘에 정읍현, 열나흘에 장성, 열닷새에 장성갈재를 넘어 하남, 다음 날인 11월 21일에 나주에 이르렀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이제 헤어져야 했다. 그날 두 형제는 노안과 삼도의 갈림길인 밤골의 삼거리 주막 율정점(栗亭店)에서 이별의 밤을 보냈다. 그날의 형과 아우가 쓴 글이다.
‘살아서는 증오한 율정점이여! 문 앞에 갈림길이 놓여 있었네. 본래가 한 뿌리에서 태어났지만 흩날려 떨어져 간 꽃잎 같다오.’(정약전)
‘이랴! 이랴! 암소로 밭갈이에 나선 농부, 띠로 이은 주막집 새벽 등잔불의 푸르스름함이 꺼지려 해서 잠자리에서 일어나 샛별을 바라보니 이별할 일 참담하다.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 묵묵히 할 말을 잃어 억지로 말을 꺼내니 목이 메어 오열만 터졌다.’(정약용)
1777년 10월이다. 15세의 정약용은 네 살 위인 정약전과 함께 화순 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와 화순 만연산 동림사에서 2년여 공부를 했다. 화순 적벽과 물염정, 광주 서석산의 서석대 등을 둘러보며 호연지기를 길렀다. 그런데 그만 신유사옥에 형인 정약종과 매형 이승훈은 참수형을 당하고 큰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자신은 강진으로 유배길에 있었다.
그렇게 다음 날 형제는 헤어졌다. 정약전은 우이도를 잠시 거쳐 흑산도로 갔다. 정약용은 영산강을 건너 강진으로 갔다. 그리고 두 형제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정약용은 강진 동문 안 주막에서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으로 1805년 10월 8일까지 약 4년을 보냈다. 처음에는 죽고 싶은 상심으로 보내다 1802년 가을쯤부터 자신의 거처를 ‘네 가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지키라’는 뜻의 사의재(四宜齋)라 하고 서당을 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순 만연산 동림사에서 만났던 화엄학의 대가 연담 스님의 제자인 백련사 주지 혜장법사가 찾아왔다. 그의 도움으로 강진읍 뒷산에 있는 보은산방에서 1년 가까이 지냈다. 또 제자의 간곡한 요청으로 1806년 9월 1일부터 1807년 12월 30일까지는 산에서 내려와 강진읍의 이학래 집에 머물렀다.
1808년에 정약용은 외가인 해남 윤씨 윤취서가 지어 놓은 귤동마을 만덕산 자락의 초당으로 옮겼다. 맑은 날이면 초당 위 언덕에서는 탐진 앞바다 너머 형인 정약전의 유배지 흑산도까지 보였다. 그렇게 형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유배가 풀리기까지 10여 년간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백여 권에 이르는 수많은 저술을 했다. 죽음과 같은 불행과 절망의 늪에서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길을 걸었다.
이곳 다산초당과 백련사 길은 야생차, 대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 가시나무, 푸조나무가 어우러지고 3백 살, 5백 살인 1,500여 그루 동백숲이 있어 즈려밟는 동백꽃 길이기도 하다.
정약용이 처음 머문 사의재의 사의는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이다. 이곳 사의재의 두어 아름 느티나무를 보며, 죽고 싶었던 정약용이 사의제에서 마음을 가다듬던 그 날을 떠올린다.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불굴의 가르침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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