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공원의 옛 이름은 성거산이다. 위에서 보면 머리를 북쪽으로 두른 한 마리의 거북이가 광주천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이다. 이에 거북을 달래려 등 위에 성거사를 세우고 목 위에 5층 석탑을 세웠다. 고려 초기의 일이다.
조선 태조 7년인 1398년 서석산 장원봉 아래에 광주향교를 세웠다. 이 산 아래 고을에서 장원하는 인재가 많아서 장원봉이라 했고, 향교터로 잡은 이유였다. 호랑이의 피해가 잦아 성의 동문안으로 향교를 옮겼다. 하지만 저지대인지라 홍수에 취약하고 건물이 좁아 다시 고을의 서쪽 성거산 거북꼬리 터를 닦아 이전하였다. 1488년 권수평 현감 때의 일이다.
1560년 목사 유경심이 향교를 중수하고, 기대승이 이를 기록하여 비를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향교가 훼손되자, 1600년 목사 이상길이 부임해 전당(殿堂)과 방실(房室)을 새로 지었다. 강항(1567∼1618)의 수은집에 있는 광주향교 중수상량문 기록이다.
목사 서형수 재임 때인 1797년 정조가 자신의 책인 ‘어정대학연의’ 등의 교정을 광주향교에 맡겼고, 이의 보답과 우대책으로 이듬해인 1798년 도과 시험을 치렀다. 이 도과에 69명이 참여 53명이 합격하였고, 점수가 높은 2명(고정봉, 임흥원)이 임금 앞에서 전시를 볼 수 있었다.
1804년 목사 김선이 낡은 건물을 개수했다. 1841년 8월 11일 밤, 명륜당이 불에 타 조철영 목사가 중수하였고, 1854년 홍재응 목사가 중수하였다. 또 일제강점기에 목사 박봉주가 비각을 중건하고 ‘광주향교비각중건기’를 자랑스레 써놨지만, 그 앞에 친일반민족 단죄문도 있다.
이들 비석을 둘러보고 향교 외삼문을 들어서면 수령 250여 년의 은행나무가 있다. 성균관의 명륜당, 고부 향교와 함께 조선향교 3대 은행나무로 알려진 나무이다. 수령으로 봐서 서형수 목사 재임 때에 심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은행나무는 우람하다거나 별다른 큰 특징은 없다. 다만 정조 임금이 내린 도과의 시험 문제인 ‘어제’와 합격자 명부인 ‘어고방목’을 명륜당 봉안각에 보관한 것과 관련이 있는 듯싶다. 당시 이를 기념하여 심었을 거로 여겨지니 장원급제 은행나무이다. 또 여기 향교가 거북꼬리 터고 은행나무가 그 꼬리에 닻처럼 섰으니, 성거사, 5층 석탑과 함께 광주 인재들을 위한 거북명당의 비보풍수 역할이 아닌가도 싶다.
은행나무는 1목, 1과, 1속, 1종 밖에 없는 나무로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왔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암수가 있고 꽃가루 속에 움직이는 정충을 가진 풍매화이다. 1억5000만 년 전에 공룡과도 함께 살았으나 공룡은 멸종되었고, 은행나무는 끈질기게 살아 화석나무라 한다.
독특한 향취의 부드러운 껍질 속 열매가 은백색이어서 백과(白果), 겉모양이 살구와 비슷하여 은빛살구인 은행(銀杏)이라 하는데 이는 한자 이름이다. 예전에는 은행잎이 오리발을 닮아 압각자(鴨脚子)였고, 열매가 손자 대에 가서야 열린다고 공손수(公孫樹)라 했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것을 행단(杏壇)이라 하며, 향교를 세우면 공자의 상징처럼 반드시 은행나무를 심고 길렀다. 그런 탓인지, 은행나무는 다른 나무들과의 생존경쟁에 약하여 숲속보다는 사람의 손길이 닿는 장소에서 잘 자란다. 또 성장하면 수명이 길어 1,000여 년을 거뜬히 살고,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어, 장수와 다산의 상징이기도 하다.
기원하고 빌어서 무슨 일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만, 진인사대천명인 게 세상사다. 그럼에도 장원봉이 있는 고을, 정조의 어제와 어고방목, 그리고 거북 명당 터의 정기까지 품은 늠름한 기상의 조선향교 3대 은행나무이며 장원급제 은행나무이다. 이 나무 앞에서 마음속 소망을 기원하고 빌어볼 일이다. 만에 하나 들어준다면 이 또한 은행나무 발복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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