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볕 더위에 최송설당을 찾아 함평 손불면과 신광면에 걸쳐있는 군유산 아래 삼천동을 찾았다. 세 개의 샘물이 솟아나는 마을이어서 삼천동이 된 이곳에는 또 군마를 길렀던 마구청이 있다.
그러다보니 신라의 영토확장과 백제 멸망을 정당화하는 이름이 남아있다. 김유신 장군이 왔고, 고려 태조 왕건, 공민왕도 이곳에 와서 산은 군유산이고 또 삼천동은 삼천 군사 주둔지요, 마구청은 신라때부터 말을 길렀던 마굿간이라고 한다.
삼청동 마을 앞 3백살 느티나무
아무튼 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 일제강점기에 경북 김천중고등학교를 설립한 최송설당의 부모와 할아버지가 계신다. 물론 그분들의 무덤과 그분들을 기리는 화순최씨 세장비가 그것이다.
백일홍이 피면 세장비 사진이 좋을까 하여 땀 뻘뻘 흘리며 찾아갔는데, 어쩐일인지 개화가 늦다. 하는 수 없이 그냥 사진을 찍고, 다음에 백일홍이 활찍 피면 한 번 더 와야지 한다.
화순 최씨 세장비
이곳에 화순최씨 세장비가 있게 된 연유다.
최송설당은 최세기를 시조로 하는 화순 최씨로 남명 조식의 수제자인 최영경의 후손이다. 증조부 최봉관(1758~1812)은 평안도 선천군의 부호군이었는데, 1811년 홍경래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때 최봉관의 외가 육촌 유문제가 홍경래의 농민군에 가담하였고, 본인도 의심을 받고 문초를 받은 뒤 옥에 갇혔다.
결국 농민봉기는 수포로 돌아갔고 최봉관은 옥사하였으며 그의 아들 상문, 학문, 영문, 필문 4형제는 전라도 고부관아의 노비가 되었다.
최봉관의 맏아들 최상문은 고부에서 외아들 최창환을 얻었다. 그리고 온갖 노력 끝에 아들을 노비에서 면천 시켰다.
전북 고부와 함평 신광은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먼 거리도 아니다. 최송설당의 아버지가 고부에 살 때, 이곳 함평 신광의 처자와 첫 결혼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최송설당은 최창환이 김천으로 이주하여 재혼하여 얻은 딸이다.
힐아버지 묘
부모 합장묘
1849년이다. 최창환은 아버지 최상문이 사망하자 모친 해주 노씨와 함께 숙부와 사촌들이 이거하여 살고 있는 경상북도 김천으로 이주하였다. 첫 부인과 사별한 최창환은 경주 정씨인 정옥경을 새 아내로 맞았다. 첫 아이를 임신한 정씨는 밝은 달밤에 흰옷 입은 노인이 노란 학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붉은 글자로 쓴 책 한 권을 주고 가는 태몽을 꾸었다.
최창환은 아내의 태몽을 듣고 조상의 원한을 풀어줄 아들을 낳을 징조라며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정작 태어난 건 딸이었다. 둘째와 셋째도 딸이었다. 서당 훈장으로 근근이 생계를 잇던 최창환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것과 멸문을 당한 가문을 신원하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어릴 적에 언문과 한문을 깨쳤고, 길쌈과 바느질에도 능한 맏딸 최송설당이 최창환에게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사내가 아니면 아버지의 한을 풀 수 없습니까? 조상의 원한은 제가 꼭 풀겠습니다.”
조선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는 ‘개화여성열전’에서 ‘시집도 안 간’ 최송설당이 열여섯 살에 머리를 틀어 올린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최송설당 자신은 삯바느질과 농사로 땅을 불려 나갔다하지만, 장사를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어떻게 재산을 불렸든 최송설당이 20대 후반에 이르렀을 때 최씨 집안은 김천에서 내로라하는 부자가 됐다. 멸문의 화를 당하고 70년 가까이 고부와 김천을 떠돌던 최씨 집안으로서는 격세지감이었다. 1882년 스물일곱 살이 된 최송설당은 6촌 동생 최광익을 부친의 양자로 입적해 후사를 걱정하던 부친의 한을 풀어드렸다. 부친의 나이 쉰여섯, 최광익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부친은 맏딸의 도움으로 양자를 들인 4년 후 조상의 원한을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1866년 마흔한 살의 최송설당은 서울 적선동으로 이주했다. 금전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문세가의 부인들과 교제할 길을 뚫었다. 그리고 1년 만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행운을 잡았다.
1887년 2월 고종은 1년간의 아관파천 뒤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의 건립을 준비했다. 명성황후 시해 뒤 고종의 총애를 받던 엄 상궁은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기 직전 잉태를 했다. 일찍부터 불교에 귀의했던 최송설당은 강남 봉은사에서 국운의 융성과 영특한 왕자의 탄생, 그리고 조상의 신원을 위해 백일기도를 올렸다. 이때 고종의 측근으로 세도를 부리던 덕수궁 전화과장 이규찬의 부인 엄씨도 매일같이 봉은사에서 불공을 드렸다. 엄 상궁의 친정 아우인 엄씨 부인은 최송설당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해 엄 상궁에게 최송설당을 칭찬하고 소개하였다. 이로 인해 최송설당은 엄 상궁이 낳은 영친왕 이은의 보모가 되었다.
영친왕 보모시절 최송설당
4년 뒤인 1901년, 최송설당은 고종에게 가문의 신원을 바라는 상소를 올릴 수 있었고 89년 만에 소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평안도 어느 곳엔가 묻혀 있을 증조부 최봉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김천에 허묘를 만들고 제를 지냈다.
또 1901년에 종9품 영릉참봉 벼슬을 얻게 했던 동생 최광익을 7년 만에 정3품까지 수직 승차 시켰다. 사촌동생 최한익과 최해익도 6품 벼슬을 얻게 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보위에 올랐다. 이토 히로부미가 교육을 구실로 황태자인 영친왕을 일본으로 데려가자, 최송설당은 11년의 영친왕 보모 생활을 마치고 궁에서 나왔다. 이 무렵 최송설당의 재산은 엄청나게 불어났고, 궁에서 나올 때 엄 귀비로부터 토지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1912년 최송설당은 무교정에 쉰다섯 칸짜리 저택을 짓고 ‘송설당’이란 당호를 내걸었다. 1914년에는 양동생 최광익의 맏아들 최석태를 정주와 선천으로 보내 조부가 고부로 유배된 이후 104년 동안 방치된 8대조까지의 선조 묘소를 찾게 했다. 5대조 묘소는 아미산에서 6대조 묘소는 봉학산에서, 정주 백현에서는 7대조와 8대조 묘소를 찾았다. 그리고 김천에 허묘를 만든 고조부 최봉관의 묘소를 선천 오목동에서 찾았다.
이어 최송설당은 서울 가좌동 석물공장에 의뢰해 최고급 석물을 제작해 기차에 싣고서 평안도 곳곳에 흩어진 선조들의 묘소까지 실어 날랐다. 오랜 세월 방치된 선조 묘소 앞에 석물을 안치하고 제수 음식을 차린 뒤 절을 올렸다. 이로써 최송설당은 조상의 죄를 씻고 가문을 일으키며 조상의 묘소를 찾아 석물을 안치하는 문중의 현창 사업을 마쳤다.
전남 항평군 신광면 송사리 삼청동 마을 앞의 이끼 서린 ‘화순최씨세장비’도 바로 이때에 세워진 거다. 이곳에 최송솔당의 부모와 조부묘가 있기 때문이다.
전라도 고부 출신 할머니라는 뜻으로 고부 할메로 불리웠던 최송설당은 1922년 최송설당문집을 발간하였다. 시문에 능하여 200여수의 한시와 60여수의 국문시가를 남겼는데 주로 여인의 규원이나 정회를 읊은 것들이었다.
또한 교육사업에도 정성을 쏟아 1931년에 전 재산을 희사하여 재단법인 송설학원을 설립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개교하였고, 오늘날의 김천중고등학교가 되었다. 건학이념은 ‘길이 사학을 경영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잡고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동양을 진압할 수 있다’(一人定邦國 一人鎭東洋 克遵此道 勿負吾志)이다.
최송설당 유품
1939년 6월 16일이다. ‘삼동에도 타고난 성품을 더럽히지 않는 자, 사물 가운데 눈 속의 소나무가 있는 고로 외람됨을 무릅쓰고 이를 호로 삼는다’며 ‘송설당’이란 이름 겸 자호를 가지고 온갖 역경을 헤치고 이기며 살던 최송설당은 84세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최송설당(崔松雪堂.1855.8.29.∼1939.6.16)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 왕실에 들어가 영친왕의 보모로 귀비에 봉해지고, 고종으로부터 송설당이라는 호를 부여받았다. 궁을 나와 김천에 귀향해서 만해 한용운의 의견에 따라 1931년 재단법인 송설학원을 설립,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개교하여 일제강점기의 민족교육에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또 최송설당은 조선의 마지막 여성 시인이다. 한양에서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한시 259수와 국문가사 50편을 남겼다. ‘송설당집’이 발간된 1922년은 ‘폐허’, ‘백조’ 등 현대시 동인지들이 유행하던 시기였기에, 최송설당의 한시와 가사는 전통 시가 문학의 마지막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최송설당의 작품 중 김천에 대한 한시 금능풍경(金陵風景)이다
백두산일지맥이 동으로 뻗어나려/ 대소백산의 되얏으매 소백산 서북가지/ 속리산이 되얏난데 속리산 한줄기가/ 남으로 뻗어나가 금릉으로 배치하고/ 김천명당 여럿난데 산명수려 그 가운데/ 기암괴석 쌍립하니 그 형상이 이상하다./ 상대하야 섰난모양 사람으로 이르며는/ 신랑신부 마주서서 초례하난 거동같이/ 남동녀서 완연하고 각색제구 구비하다./ 용두방축 동자상(童子床)에 황신이 기르기요/ 감천수 주전자에 약수동 술잔이라/ 과하주천 술을 부어 교배하난 거동이며/ 하로노인 상객으로 마좌산 말을모니/ 시내거리 연석되어 내왕손님 모여든다./ 미곡에 쌓인백미 금곡에 빛난황금/ 봉황대상 봉황유(鳳凰遊)라 봉황같이 화락부부/ 고왕금래(古往今來) 유전(流轉)하니 천장지구(天長地久)무궁일세./ 이따에서 님취여혼 하게면/ 군자숙녀 쌍을이뤄 봉황우비(鳳凰于飛)하오리다
김천고등학교 교정의 최송설당 동상
금화를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는 말이 있다. 부의 축적에 대한 여러 말이 있지만, 그녀는 여류시인이며 근대교육의 선구자란 거룩한 이름으로 눈 속의 푸른 솔처럼 그 이름을 오늘에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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