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양록을 읽으며
흉노로도 모자라서
서해까지 끌려기
간양하던 중랑장 소무의 행적
어찌, 님께선 건차라고 했던가
님이 가신 일본은 끌려감이 아니고
하늘이 내리신
나라 구함의 길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먼저 가신 님을 따르려
간양록 구절구절
사백년을 간직한
님의 서러운 눈물을 줍습니다
전 영광문화원장 정형택 시인의 시다.
강항(1567~1618)은 영광 출신 문신이다. 정유재란 때인 1597년 영광 앞바다에서 왜군에게 일가족과 함께 사로잡혀 왜국에서 억류되었다가 4년만인 1600년 귀국하였다. 왜국에서 성리학에 관심이 많은 승려 출신의 후지아라 세이카(등원성와藤原惺窩)에게 주자성리학을 전수해주었다. 귀국하여 왜국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것이 간양록이다.
임진 정유의 왜란은 호남에서만도 20여만 명의 백성이 코나 귀를 베어가는 왜의 만행에 희생되었으며, 10여만 명 이상이 끌려가 노예, 도공, 어부, 부역 등의 고초를 당하였다. 돌아온 사람은 겨우 천여명이니 그 이별의 통한은 6·25에 앞선다.
간양록은 처음에 죄인이 타는 수레라는 뜻의 건거록(巾車錄)이라 했으나, 후학들이 강항의 시와 권필의 시에 있는 소무(蘇武)의 고사를 인용한 간양(看羊)이란 시어를 가져와 간양록이라 하였다.
‘간양’이란 숫양이 새끼를 낳아야 소무를 고국으로 보내주겠다고 말한 흉노 왕의 말이다. 그 소무는 바이칼호에서 19년을 살다 고국인 한나라에 돌아왔다.이때에 인생초로와 같다는 말도 생겼으니, 아침이슬과도 같은 인생을 숫양이 새끼를 낳도록 보냈으니, 간양은 참으로 허망한 말이기도 하다.
‘어린 아이 용과 첩의 소생 애생을 모래 밭에 버려두었는데, 조수가 밀려 떠내려가느라 우는 소리가 귀에 들리더니 한참만에야 끊어졌다. 나는 나이가 30세에 비로소 이 아이들 얻었는데, 태몽에 새끼용이 물 뒤에 뜬 것은 보았으므로 드이어 이름일 용이라 지었던 것이다. 누가 그 아이가 물에 빠져 죽으리라 생각했겠는가? 부생(浮生)의 온갖 일이 dlal 정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사람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다.
강항이 왜에게 끌려갈 때 자식들이 죽는 과정을 ’섭란사적‘에서 묘사한 글이다. 부모자식과 죽음으로 이별하는 일을 글로 쓸 때의 심정이 오죽했으랴, 읽는 이의 창자도 끊어지는 듯하다.
이 강항을 모신 곳이 영광의 내산서원이다.
(들머리의 강항 선생 상)
(내산서원 전경)
(내산서원)
강항의 간양록은 다섯편의 글로 구성되어있다.
선조에게 올린 소(疏)인 적중봉소(賊中封疏)는 왜에 억류되어 있던 중에 작성한 것이다. 피란부터 잡혀서 왜에 가기까지의 과정과 그곳에서의 생활이 요약적으로 서술되어있다. 또 조선으로 돌아와 죄를 받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다.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은 왜에 있을 때 보고 들은 것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조선에 온 뒤 곧바로 조정에 바친 글이다,
고부인격(告俘人檄)은 포로들에게 당부하는 글로 고사를 많이 인용하여 왜를 비판하고 임금의 은혜에 대해 강조한다. 또 포로로서의 자신의 심정을 서술하며 포로들에게 힘을 모으라고 한다.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는 부산에 도착하여 명으로 한양으로 바로 올라간 뒤, 일본의 사정에 대해 기술한 글이다.
섭란사적(涉亂事迹)은 문학성이 짙은 글이다. 피란 전의 상황, 일본에서의 억류 생활을 마치고 조산으로 오는 길의 마지막 경유지인 대마도를 출발할 때까지 시간 순서대로 체험과 심리가 서술된 일기체의 글이다. 초유의 환란을 당해 피란을 나갔다가 왜로 끌려갔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 이별하고 자식과 조카의 죽음을 보는 등 비극적인 경험이 이 심란사적에 강항의 시 31수가 함께 있다.
강항의 섭란사적 첫 부분과 한 시 2 수를 감상해본다.
정유년 2월 초 8일에 나는 호조랑(戶曹郞)으로 고유장(告由狀)을 바치고 귀성(歸省)하여 유봉(流峯)의 고향 땅에서 농사를 돌보고 있었다. 5월 17일에 명(明) 나라 장수 양 총병(楊摠兵 양호(楊鎬))이 서울에서 왜적을 방어할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남쪽의 남원(南原)으로 내려갔다. 참판(參判) 이광정(李光庭)이 분호조(分戶曹)로서 전라도에 군량을 독려하는 일로 조정에 청하여서, 조정에서는 나와 삼가(三嘉)에 사는 예조 좌랑(禮曹佐郞) 윤선(尹銑)을 그 직에 보임시켰다.
나는 5월 그믐에 격문에 따라 부임하니, 이 상공(李相公 이광정을 이름)은 남원에 있으면서 지방(支放)을 감검(監檢)하고 나에게 운반을 독촉하라고 명하였다. 7월 그믐 사이에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이 한산도(閑山島)에서 패전하여 한산도가 함락을 당하였고, 8월 보름 경에 적의 군사가 이미 남원을 침범하여 포위 공격한 3일만에 양 총병은 포위망을 돌파하고 북으로 나오니, 성은 끝내 함락되었다. 나는 남의 막부(幕府)가 된 이상에는 주사(主司)의 거처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함평(咸平)에서 일주야를 달리어 순창(淳昌)에 당도하였다. 여기서 참판이 북상(北上)했다는 말을 듣고서야 마침내 본군으로 돌아와 전 군수(郡守) 순찰사 종사관(巡察使從事官)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열읍(列邑)에 격서(檄書)를 전달하여 의병을 수합하니, 나라를 염려하는 선비가 수백 명이 왔다. 그런데 적의 군사는 한 부대가 이미 노령(蘆嶺)을 넘어 연해변에는 간정(乾淨)한 땅이라고는 한 곳도 없고, 오합(烏合)의 군중은 한꺼번에 흩어졌다. 그래서 김공은 성을 나와 북으로 올라가고 나는 성을 나와 집에 당도하여, 노친(老親)을 모시고 집안 아이들을 거느리고 논잠포(論岑浦)로 나가서 배를 마련하는 중이었는데, 신임 순찰사(巡察使) 황신(黃愼) 영공(令公)이 종사(從事)로써 나를 불렀다. 육로(陸路)는 이미 길이 막혔었다.
9월 14일에 왜적은 이미 영광군(靈光郡)을 불태우고 산을 수색하고 바다를 훑어 인물(人物)을 도살(屠殺)하므로, 나는 밤 2경에 배를 탔다. 그런데 부친이 본시 배멀미를 걱정하는 처지신데, 배가 작아서 흔들리기 쉽기 때문에 계부(季父)의 배에 옮겨 모시고, 종형제는 배가 좁아서 탈 수 없으므로 마지못해 두 형수 및 구수(丘嫂 장형수)ㆍ처조부(妻祖父)ㆍ처부모(妻父母) 및 나의 처ㆍ첩(妻妾)이 함께 탄 배에 탔다. 그리고 자부(姊夫)의 부친 심안평(沈安枰)의 일가족이 궁지에 빠져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또한 함께 타자고 하고 보니, 배는 작고 사람은 많아서 배가 몹시 더디게 갔다.
15일에 두 배가 묘두(猫頭)에서 함께 자는데 피란하는 배가 모인 것이 거의 백여 척이었다.
16일에도 묘두에서 자고, 17일에는 비로초(飛露草)에서 잤다. 18일에 종형 협(浹)이 선전관(宣傳官)으로서 표신(標信)을 받들고 신통제(新統制) 이순신(李舜臣)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우수영(右水營)에서 선소(船所)로 달려왔다.
20일에 비로소 해상의 왜선 천여 척이 이미 우수영에 당도하였으므로, 통제사는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일문(一門)의 부형과 더불어 향해 갈 곳을 의논하자, 혹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자고 하고, 혹은 흑산도(黑山島)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나는 종형 홍(洪)ㆍ협(浹)과 함께 말하기를
“배 안에 있는 장정이 두 배를 합치면 거의 40여 명에 달하니, 통제사에게 붙어서 싸우기도 하고 후퇴하기도 하는 것이 설사 성공을 못하더라도 떳떳하게 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의논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사공 문기(文己)라는 자가 가만히 그 말을 듣고서는, 자기 자녀(子女) 네 사람이 어의도(於矣島)에 있으므로 실어올 작정을 하고서 21일 밤중에 나의 형제가 곤히 잠든 틈에 바람이 부는 틈을 타서 배 줄을 끌러 놓으니, 별안간 부친이 타고 계시는 배와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
배가 떠나서 진월도(珍月島)에 이르러, 통제(統制)의 배 10여 척이 이미 각씨도(各氏島)를 지나갔다는 말을 듣고 뱃사공을 나무라며 배를 돌려 서쪽으로 올라가게 하였으나 북풍이 너무 세게 불어 배가 올라갈 수가 없었다. 적의 기세는 이미 급박한데 부자가 서로 잃어버렸으니, 막다른 길에 의지할 것은 단지 뱃사람들뿐이어서 그 죄를 다스릴 수도 없게 되었다.
22일 부친이 탄 배가 돌아서 염소(鹽所)로 향했다는 소식을 잘못 듣고서 염소의 당두(唐頭)로 향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심안평(沈安枰)의 일가(一家)는 배가 좁아서 육지에 내리자, 창두(蒼頭) 만춘(萬春)이라는 자는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는 자인데, 물을 길어 온다고 핑계대고서 육지로 달아나 버렸다.
23일 아침 사(巳)시에 당두에서 또 논잠포(論岑浦)로 향했는데 노친이 혹시 논잠포에 계시는가 생각되어서였다. 바다 안개가 자욱한 속에 문득 황당선(荒唐船 바다 위에서 출몰하는 외국의 배) 한 척이 돌연히 날아오자 뱃사람들이 왜선이 온다고 외치므로 나는 사로잡힘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서, 옷을 벗고 물 속에 뛰어버리자, 한 집안 처자 형제와 한 배의 남녀가 거의 반 이상이 함께 물에 빠졌다. 그런데 배 매는 언덕이어서 물이 얕아, 적이 와선(臥船 폐선)의 장대로 끌어내어 일제히 포박하여 세워 놓았다. 오직 김주천(金柱天) 형제와 노비(奴婢) 10여 명이 언덕에 올라 달아나서 모면되고, 망모(亡母)ㆍ망형(亡兄)의 목주(木主 신주)는 중형이 안고 물 속에 떨어졌는데, 끌어내는 사이에 수습하지 못하였으니, 돌아가신 모친과 살아계신 부친을 섬겨보려던 뜻이 한꺼번에 다하고 말았다.
어린아이 용(龍)과 첩의 소생 딸 애생(愛生)을 모래 밭에 버려 두었는데, 조수가 밀려 떠내려가느라 우는 소리가 귀에 들리더니 한참만에야 끊어졌다. 나는 나이가 30세에 비로소 이 아이를 얻었는데, 태몽에 새끼 용이 물 위에 뜬 것을 보았으므로 드디어 이름을 용이라 지었던 것이다. 누가 그 아이가 물에 빠져 죽으리라 생각했겠는가? 부생(浮生)의 온갖 일이 미리 정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사람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다. 왜적이 내가 타고 가던 배를 저희들 배의 꼬리에 달고 바람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는데 배가 살과 같이 빨랐다.
24일 무안현(務安縣)의 한 해곡(海曲)에 당도하니, 땅 이름은 낙두(落頭)라 하였다. 적의 배 수천 척이 항구에 가득 차서 붉은 기ㆍ흰 기가 햇볕 아래 비치고, 반수 이상이 우리나라 남녀로 서로 뒤섞여 있고, 양옆에는 어지러이 쌓인 시체가 산과 같고, 울음 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바다 조수도 역시 흐느꼈다. 무슨 마음으로 낳았으며, 무슨 죄로 죽는 것인가? 나는 평생에 뭇 사람 중에서 가장 나약하고 겁이 많은데도, 이때만은 매양 살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배가 이미 중류로 떠나가자, 왜적 하나가 통역을 대동하고 와서 묻기를,
“수로(水路)의 대장이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태안(泰安) 안행량(安行梁)에 있는데, 옛 이름은 난행량(難行梁)이다. 하도(下道)의 조선(漕船)이 해마다 표류되고 난파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좋게 지어서 제압한 것인데, 대개 수로의 천험(天險)이 된다. 그러므로 명 나라 장수인 소(召)ㆍ고(顧) 두 유격(遊擊)이 과선(戈船) 만여 척을 거느리고 양(梁)의 위 아래를 가로 끊어, 유선(遊船)이 이미 군산포(群山浦)에 와 있고, 통제사(이순신을 가리킴)는 중과부적으로 물러나 명 나라 군사와 합세하고 있다.”
하자, 적의 무리는 서로 돌아보며 기가 꺾였다.
나는 가만히 통역에게, 나를 잡아가는 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이예주수(伊豫州守) 좌도(佐渡)의 부곡(部曲) 신칠랑(信七郞)이라는 자라고 했다. 밤 2경에 처부(妻父)가 몰래 묶은 줄을 풀고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 들어가자, 적의 무리는 떼를 지어 소리를 치며 즉시 끌어내었다. 이 때문에 나의 집안 식구를 더욱 단단히 얽어매서 오라줄이 살 속을 파고 들어가서 손등이 모두 갈라지고 터져서 끝내 큰 종기가 되었다. 그래서 3년을 지나도록 굽히고 펴지를 못했으며 오른손에는 흉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인하여 통역에게 묻기를,
“적이 어째서 우리들을 죽이지 아니하느냐?”
하니, 통역이 대답하기를,
“공 등이 사립(絲笠)을 쓰고 명주 옷을 입었으므로 관인(官人)이라고 생각하여 포박하여 일본에 송치하려고 하기 때문에 삼엄하게 경계하고 지키는 것이다.”
하였다.
아! 사나운 진(秦) 나라가 예(禮)를 버리자 노중련(魯仲連)은 동해(東海)에 빠져 죽기로 했고, 무왕(武王)은 포학한 자를 토벌하였는데도 백이(伯夷)는 오히려 서산(西山)에서 굶어죽었다. 하물며 이 적은 백만(百蠻)의 추한 종류요, 우리나라 신민과는 불공대천의 원수이므로, 한 순간이라도 구차히 산다는 것은 만 번 죽어도 그 죄가 오히려 가볍다 하겠는데, 몸이 얽혀 있으니 자유가 없음에야 어찌하랴.
3일이 지나자 왜적은 통역을 대동하고 와서 묻기를,
누가 바로 정처(正妻)이냐?“
하니, 부인들이 다 자수하자 왜선으로 몰아 올라가게 하고, 나의 형제를 옮겨서 실으면서 말하기를,
“장차 너희들을 죽일 것이다.”
하였다. 나의 첩ㆍ처조부 및 장형수ㆍ비자(婢子) 10명과 처부의 서제매(庶弟妹) 등을 혹은 나누어 싣기도 하고 혹은 살해하기도 했다. 슬프도다! 망형이 죽던 날에 쪽지 하나로 나에게 부탁하기를,
“네가 인간에 살아 있으니 과부된 나의 아내는 힘입을 데가 있구나!”
하였는데, 누가 갑자기 이 지경을 당할 줄이야 생각했겠는가? 삶과 죽음을 생각하니 비통하기 그지없지만, 나 역시 목숨이 어느 때까지 붙어 있을지 알 수 없는 처지였다. 노비(奴婢)들도 나를 버리고 달아난 자는 모두 목숨을 도생했고, 상전을 연연하여 차마 가지 못한 자는 모두 살해를 당했으니, 이 역시 슬픈 일일 따름이었다.
이윽고 여러 왜가 많은 배를 발동하여 남으로 내려갔는데, 행로가 영산창(榮山倉)ㆍ우수영(右水營)을 지나서 순천(順天) 왜교(倭橋)에 당도했다. 이곳에는 판축(板築)이 이미 갖추어 해안에다 성을 쌓아 위로 은하수에까지 맞닿을 정도였다. 뭇 배들은 모두 줄지어 정박해 있었는데, 유독 부인(俘人)이 탄 배 백여 척만은 모두 바다 가운데 떠 있었다. 대개 포로되어 이곳에 당도할 때까지 무릇 9일 동안에 물 한 모금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죽지 아니하니 진실로 목숨이 모진 모양이다. 뒤에 오는 남녀는 태반이 친구집 가족들이었는데, 양우상(梁宇翔 양산룡(梁山龍)을 이름)의 온 집안이 참몰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날 왜녀(倭女)가 밥 한 사발씩을 사람들에게 각기 나누어 주었는데, 쌀은 뉘도 제대로 벗기지 아니했고 모래가 반을 차지했고, 생선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뱃사람들은 배가 하도 고파서 깨끗이 씻어 말려서 요기를 했다. 밤중에 옆 배에서 여자가 울다가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옥(玉)을 쪼개는 듯하였다. 나는 온 집안이 참몰당한 뒤부터 두 눈이 말라 붙었는데, 이날 밤에는 옷소매가 다 젖었다. 따라서 절구시(絶句詩)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어디서 들려오는 ※죽지사(竹枝詞) 노래 / 何處竹枝詞
밤조차 삼경인데 달도 하얗도다 / 三更月白時
이웃 배가 모두 눈물짓는데 / 隣船皆下淚
가장 젖은 건 ※초신의 옷이로다 / 最濕楚臣衣
※죽지사(竹枝詞) : 당나라 유우석(劉禹錫)이 지은 詩, 남녀가 서로 그리워 애타게 부르는 노래
※초신(楚臣) : 초나라 신하 종의(鍾儀)가 진나라에 잡혀가 초나라 옷을 입고 오직 조국만 생각하고 살았다는 고사(故事)
이튿날에 한 척의 적의 배가 옆을 스쳐가는데 어떤 여자가 급히 ‘영광(靈光)사람 영광 사람’ 하고 부르므로, 둘째 형수씨가 나가 물으니, 바로 애생(愛生)의 어미였다. 배를 따로 탄 이후로 벌써 귀신이 되었으리라고들 말하였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들이 살아 있음을 알았다. 그이가 천만 가지로 슬피 하소연하는 것을 귀로는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이날 밤부터 밤마다 통곡을 했다. 왜노(倭奴)가 아무리 때려도 그치지 않더니 필경에는 밥을 먹지 아니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절구시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한 바다 아득아득 달조차 지려는데 / 滄海茫茫月欲沈
눈물이 이슬과 함께 옷섶을 적시누나 / 淚和涼露濕羅衿
넘실넘실한 이 수면 상사한들 어찌하리 / 盈盈一水相思恨
견우 직녀 응당 이 밤 심정 알거로세 / 牛女應知此夜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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