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뜨락>
남의 애를 끊나니
김 목(남도문학 발행인)
불볕 폭염에 가뭄이 지속되고 있다. 가장 마음이 타는 분들은 농민이리라. 거북 등처럼 갈라진 농토에 서서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는 농민들의 모습이 안쓰럽고 애처롭다.
이러한 때에 정치권 행태는 더욱 답답함을 더한다. 도움은커녕 푸석푸석해진 마음에 풀풀 먼지만 날리게 한다.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가’다. 이 시는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있던 1595년 8월 15일 경남 통영의 한산도에서 썼다고 한다.
시의 배경이 한산도고 1595년 당일에 쓴 장군의 난중일기 ‘8월 15일. 을묘.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우수사 이억기, 가리포 첨사 이응표, 임치 현감 홍견 등 여러 장수들이 함께 왔다. 이날 삼도의 사수와 본도의 잡색군에게 음식을 먹이고 종일 여러 장수들과 함께 술에 취했다. 이날 밤 희미한 달빛이 수루를 비치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시를 읊었다.’를 근거로 그리 추정한다.
그런데 이 한산도가를 전남 보성의 열선루에서 썼다는 주장도 있다. 1597년 8월 15일의 난중일기다.
‘8월 15일. 계유. 비 오다가 저녁나절에 맑게 개었다. 식사를 한 뒤 열선루에 앉아있으니, 선전관 박천봉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8월 7일에 만들어진 공문이었다. 영의정(유성룡)은 경기 지방에서 순시 중이라고 했다. 곧 잘 받들어 받았다는 장계를 썼다. 보성의 군기를 검열하여 네 마리의 말에 나누어 실었다. 저녁에 밝은 달이 수루 위를 비추니 심회가 편치 않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날 이순신은 보성 읍성에서 제일 높은 곳인 열선루에서 ‘조선 수군이 미약하니 육군에 의탁해 싸우도록 하라.’는 수군 폐지의 유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장계를 올리고, 한 달여 뒤인 9월 16일 대승을 거두었으니 명량대첩이다.
한편 이순신을 뒤쫓던 왜구는 8월 20일 보성읍성을 공격해 열선루 등 성내 관아를 모두 불에 태웠다. 그 뒤 1610년에 보성군수 이직이 열선정으로 고쳐 중건했으나, 1871년의 호남읍지에는 ‘터만 남아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곳 열선루에서 쓴 한산도가의 첫 글자는 한(閑)이 아닌 한(寒)이다. 하지만 글자가 다른들 어떠랴? 글자가 다르다고 창자가 끊어지는 이순신의 우국애민의 심정이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 보성 읍성의 동문 누각은 계양루(啓陽樓)였다. 이 계양루는 중국 위(衛)나라의 ‘계란 때문에 인재를 버리지 않는다.’ 고 계(啓)한 고사에서 연유한다. 전국 시대에 위나라 자사가 임금에게 장수 ‘구변’을 천거했다. 임금은 그가 하급관리 때 계란 두 개를 뇌물로 받았다며 난색을 표명했다. 이에 자사는 ‘계란 두 개 때문에 나라의 방패가 될 장수를 버리면, 이웃 나라가 비웃는다.’며 ‘인재 발탁에 완전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순신은 왕명을 어긴 누명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백의종군까지 했다. 하지만 다시 수군 폐지의 명을 어겼다. 이는 왕명보다 왜구토벌을 통한 우국애민의 결단이었으니, 열선루는 이순신이 성웅이었음을 증명하는 유적지다.
아울러 계양루는 인물은 보지 않고 계란만 보며 헐뜯기에 혈안인 작금의 일부 정치인들이 다시 새길 교훈이다. 계란은 뇌물이기도 했지만, 부정부패한 자들을 규탄하는 데도 쓰였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한산도가’와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다’고 장계를 쓴 보성의 열선루는 지금 복원을 하고 있다. 이왕이면 계양루도 복원되어 진정한 우국애민과 협치의 산교육장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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