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합
죽음은 영웅호걸도 천하절색도 피할 수 없는 우주만물생성소멸의 이치다. 1825년 72세의 이서구가 세상 소풍을 마칠 때다,
“이제 세상 소풍을 마칠 때가 됐구나. 인생사 다 허망한 것이니, 죽음 앞에 두려움은 없으나 평생에 너희들을 위해 송곳 세울 만한 농토도 남겨놓지 않은 것이 유감이구나. 그러나 너희를 위해서 비서(秘書) 한 장을 남겨 놨으니, 이것을 잘 보관했다가 위급한 일이 닥치거든 그때에 떼어 보거라.”
이서구는 잘 봉해진 비서 한통을 운명을 지켜보는 자손들에게 물려주고 이승을 떠났다.
그 후 몇 해가 지나갔다. 자손들은 별 일은 없었지만 이서구가 남긴 비서가 몹시 궁금하였다.
“우리 할아버님이 남기신 비서 내용을 한 번 봅시다. 도대체 무엇이 쓰여 있는 지 궁금하오.”
“그럽시다.”
이서구 후손들은 상의 끝에 할아버지가 남긴 비서를 꺼내와 조심스레 떼어 봤다. 봉투를 뜯으니 또 다른 봉투가 나왔다. 그리고 그 위에 ‘급한 화가 있기 전에는 떼어 보지 말라고 했는데, 급한 화도 없는데 왜 떼어 보느냐? 너희가 조상 말씀을 소홀히 하다가는 더 큰 화를 면치 못하리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이왕 뜯어봤으니 한 번 더 뜯어보자고 후손들은 또 한 겹을 뜯었다.
‘한 번도 과한데 어찌 두 번이나 조상의 유교를 어기느냐. 너희가 나의 말을 위반하면 진정 참화를 면치 못하리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자 후손들은 그만 겁이 벌컥 났다.
“우리가 잘못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후손들은 비서가 든 봉투 앞에 엎드려 사죄하고는 더 이상 떼어 보지 않고 봉투를 다시 잘 보관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또 몇 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해 이서구의 증손자가 살인죄로 고양고을의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 일을 어찌 하면 좋겠소?”
“우리 가문에 이보다 더한 참화가 어디 있겠소? 이번에야말로 할아버지의 비서를 떼어봅시다.”
가족들은 의논 끝에 이서구의 비서를 떼어봤다.
‘이 봉서를 고양 현감에게 갖다 드려라.’
떼어 본 봉투 앞에 그런 글이 쓰여 있었다.
이서구 후손들은 즉시 그 비서 봉투를 들고 고양 현감에게 가서 탄원을 했다.
“저희는 이서구의 후손들입니다. 할아버지께서 글을 남기셨는데 현감님께 드리라 해서 가져왔습니다.”
고양 현감은 이서구가 당시에 학문과 덕이 높은 재상이었고, 천기를 가늠하는 신선과 같은 분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한테 보낼 봉서까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는 생각으로 봉서를 뜯었다.
‘성주 이하 관속들은 하나도 남지 말고 모두 동헌 뜰 아래로 내려서시오.’
봉서 앞에 그런 글이 쓰여 있었다.
고양 현감은 그 글 뜻이 무얼 말하는지 몰랐지만, 얼떨결에 모든 관속을 데리고 동헌 뜰 아래로 내려갔다.
그 순간이다.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우지끈 뚝딱!’ 우레 치는 소릴 내며 동헌 대들보가 부러지더니 동헌을 덮쳤다.
“휴우! 다행이로다.”
고양 현감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봉서를 또 한 번 뜯어보니 비로소 마지막 비서가 나왔다.
‘면이동량화 활아삼세손(免爾棟樑禍 活我三世孫)’
이란 글이 쓰여 있었다.
‘그대들을 대들보에서 치일 화를 면해 주었으니, 내 증손을 살려 주오.’
하는 뜻이었다.
고양 현감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서구의 비서로 인해 여러 인명이 살아난 은공에 보답키로 했다. 이서구의 증손을 살려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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