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여름 사랑 나합

여름 사랑 나합 1. 더러운 날

운당 2016. 3. 24. 11:10

<소설>

 

여름 사랑 나합

 

곧 이지러질 둥근 보름달이 뜨는 반도 동쪽 땅 끝 한 구석지에 구미호들이 살았다. 그 자들의 시조 닭까지 마시오가 선산에서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쓴 뒤, 바다 건너 왜왕을 우러러 기도하니 반은 물개의 음신이요 반은 지렁이의 음핵인 반신반인(半腎半蚓)’이 줄줄이 태어나도다. 그 자들이 떼를 이뤄 도적무리가 되니 훗날 귀태족(鬼胎族)’이 바로 그자들이다. (역경 401절 귀태족편)

 

1. 더러운 날

 

네 이놈! 이 더러운 날 무슨 낮잠이냐?”

불호령 소리였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니 온 몸이 꽁꽁 밧줄로 묶여있다.

낮잠을 잤던 흐릿하던 머리가 차츰 맑아지자, 눈이 번쩍 뜨인다. 앞과 좌우를 둘러보니, 다시 기절초풍 일보직전이다.

눈앞에는 한 노인이 청룡언월도인 냉염거(冷艶鋸)를 든 관우처럼 용머리 지팡이를 짚고 서서 흰 머리와 흰 수염을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또 좌우로는 십이지신장, 그러니까 쥐, , 호랑이, 토끼, , , , , 원숭이, , , 돼지가 갑옷을 입고 칼과 창을 든 채 두 눈을 부릅뜨고 두 줄로 도열하듯 서있었다.

네 이놈! 이 더러운 날 낮잠이나 자다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그 중 제일 대장인 듯 용머리 신장이 맨 앞에서 나를 노려보며 호통을 친다.

얼떨결에 처음엔 이 더운 날 낮잠을 잤다는 말로 들었다. 그런데 이 더러운 날 낮잠을 잤다고 한다.

이 더러운 날 낮잠을 잔 게 죄라니요?”

처음엔 말을 올리다가 생각하니 은근히 화가 솟는다.

그러니까 더러운 날 낮잠이나 자야지, 이쥐놈닭그년 반신반인, 쥐닭종천가라도 불러야 한단 말이냐? 무슨 그런 이쥐놈닭그년 같은 괘씸한 말이 있느냐?”

그래서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요즘 인구에 회자하는 강한 욕과 반말로 마주 노려봤다.

허허! 네 놈 간이 부었구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적반하장, 오히려 이 세상 가장 더러운 욕으로 말대꾸를 해?”

이거 봐. 용머리 도깨비인지, 귀신인지 모르겠지만, 네 놈들 모가지를 뎅강뎅강 잘라 사대강 큰빗이끼벌레와 리굴라촌충에게 던져버리기 전에 내 몸을 묶은 이 밧줄부터 풀지 못할까?”

이판사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했던가? 나는 더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

날은 무슨?”

대답하며 생각해보니 2015815, 왜국의 압제에 허덕이던 조선백성이 맞이한 해방 70주년 광복절이다.

혹시 태극기 땜에?’

그렇다. 요즈음 들어 뜬금없이 태극기가 곧 애국심이 되었다. 인간말종 닭까지마시오의 칠푼여식인 닭그년이 태극기를 달고 애국가를 부르라 하니 추종 떨거지들이 알아서 기는 상황이 되었고, 그 나발에 판세가 그리 흘렀다.

그럼 내가 태극기 다는 걸 싫어하느냐? 아니다. 나도 그동안 국경일이면 태극기를 항시 달았다. 그런데 그 느자구 없는 닭그년이 자다 봉창 두드리는 고무다리 긁는 소리로 태극기가 애국심이다고 말하는 통에 그만 배알이 꼬였다. 그래서 광복 70주년이라며 친일매국노 후손들이 더 설치는 올해에는 태극기를 달지 않았다. 특히 닭그년의 동생 닭구녕이 일왕을 천왕폐하라고 하질 않나, 일본에게 위안부 사과를 하라고 요구하는 건 부당하다고 하질 않나, 그 망발을 듣고 정말 기가 막히고 코까지 막혀 마시던 술잔까지 던져버린 터였다. 당연히 태극기가 애국심이라는 말은 오히려 화만 돋우었다.

그 두 닭그년과 닭구녕 애비인 닭까지마시오는 혈서로 왜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왜군장교가 되어선 독립투사들을 고문하고 죽인 놈이다. 또 닭그년은 온갖 사기 잡술로 민주시민을 능멸하고, 닭구녕은 불난 집 앞에서 난리부르스로 부채질이다. 그러면서 태극기하고 애국심이 동격이라고 입주댕일 나불거려? 태극기는 그저 태극기야. 그리고 애국심은 태극기와는 상관없이 그저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나라사랑의 발로인 거다.’

광복절 날 아침이다. 그 닭그년 일당이 지시를 했는지 어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른 아침부터 예년에는 하지도 않던 태극기를 달아 애국심을 실천합시다.’라는 동사무소 여직원의 선무방송이 있었다.

그게 더 비위가 상했다. 그래도 태극기를 한 번 달아볼까? 하다가 위와 같이 중얼중얼 한동안 욕을 내 뱉은 뒤 꺼냈던 태극기를 서랍 속에 다시 휙 쳐놓고 말았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 계속 혼잣소리로 중얼중얼 주어가 있는지 없는지 상관도 않고 마구 욕을 해댔다. 그랬더니 궂은 비 주룩 대는 날 닭그년과 닭구녕 그 두 년 귀싸대기를 먼지 풀풀 날리게 쳐댄 것처럼 분이 조금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