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서 쓰는 이야기

걸으면서 쓰는 이야기 (39)

운당 2014. 10. 8. 07:21



부하 무관들과 5천 결사대에게 지시를 하고 계백도 집으로 갔다. 가족이 적군의 손에 넘어가 치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계백은 가족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 불까지 질러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작별인사를 한 것이다.

다음 날이다. 백제의 5천 결사대는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모였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죽음이 두려워 슬그머니 내뺄 군사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어김없이 다 모인 것이다. 소식을 듣고 스스로 나온 군사가 있어 그 수가 오히려 하루 전보다 더 많았다.

, 가자. 출정이다.”

계백은 5천 군사를 거느리고 황산벌로 진군했다.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군사를 셋으로 나누었다. 황산성을 최후의 보루로 삼고 동쪽의 황령산에 좌군을, 남쪽의 모촌리산성에 우군을 배치하였다. 계백 자신은 중군이 되어 산직리산성을 맡았다.

배치를 마친 계백은 부장들을 거느리고 군사들 앞으로 나아갔다. 숱한 전투에서 자신을 지켜준 투구와 갑옷을 입고 계백은 장검을 높이 빼들었다.

백제의 자랑스러운 용사들이여! 우리는 마지막 싸움터에 왔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오늘 이 싸움은 우리들의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처자, 바람 앞에 촛불인 우리 백제의 운명이 걸려있다. 자랑스러운 군사들이여! 적군의 수가 많다고 두려워 말라. 비록 적군이 우리의 열 배인 5만 대군이지만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물리칠 수 있다. 신라군을 겁내는 백제 군사는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옛날 중국의 춘추시대에 월왕 구천은 5천 군사로 오왕 부차의 70만 대군을 쳐부쉈다. 15년 전 요동전쟁 때 고구려의 연개소문 장군도 수십 배의 당나라 오랑캐를 물리쳤다. 우리도 해낼 수 있다. 5천 백제군 한 사람이 신라군 10명씩을 물리치면 된다. 우리는 반드시 이 싸움에 승리하여 가족을 살리고 나라를 구하자. 내가 죽어 우리 모두를 살리자. 죽을지언정 결코 물러나지 않는 우리 백제군이다. 위대한 백제군이여! 맹세하자. 죽기를 각오하고 결코 물러서지 말자. 알아들었는가?”

우렁찬 목소리가 황산의 아침 들판을 쩌렁쩌렁 울렸다. 8월의 뜨거운 아침 해가 산등성이 위로 마악 솟구쳐 올랐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눈부신 햇살이 벌판 가득히 쏟아졌다.

! 와아아!”

백제의 5천 결사대는 대답대신 우렁찬 함성을 질렀다. 울긋불긋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이 들녘을 덮고, 갑옷과 투구, 창칼에서 햇살이 무섭게 번쩍였다.

백제 군사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최후의 전쟁터라는 걸 알았다. 어쩌면 단 한사람도 살아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렵거나 무섭지 않았다. 절망하지도 않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원망도 하지 않았다. 위대한 백제군의 기상을 잃지 않았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기도 했다. 대륙의 큰 나라인 북위의 수십만 대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기도 했다. 그런 긍지와 자부심을 지닌 백제군이다. 신라군이 5만 대군이라 해도 조금도 겁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굳은 각오와 용기를 지닌 백제군은 좌, , 중군 3군으로 나뉘어 각자의 성으로 들어갔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