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부르던 아내의 입술도, 아버지를 부르던 아이들의 입술도 이제는 굳게 닫혔다.
“사랑하오.”
계백은 이제 대답이 없는 아내를 다시 한 번 힘껏 끌어안았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아이들도 하나하나 끌어안았다. 그 순간이었다.
“아버지! 사랑해요.”
여섯 살짜리 막내딸이었다. 아직 숨이 안 끊어졌는지 살포시 눈을 떴다. 그러더니 입술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두 볼에 보조개가 예쁘게 파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언제나 보던 그 미소와 보조개가 마지막이었다. 여섯 살 막내딸은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다시 두 눈을 스르르 감아버렸다.
“아가! 아가!”
계백이 막내딸의 몸을 흔들었지만 더 이상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싸늘하게 식어갔다.
“엉엉엉!”
계백은 그만 참을 수가 없었다. 막내딸을 껴안고 이번에는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그렇게 크게 울었다.
그리고 칼을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집에 머무를 시간이 없었다.
밖으로 나온 계백은 겨우살이용으로 준비한 장작과 나무들을 가져와 집안 곳곳에 쌓았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한동안 활활 타오르던 불이 꺼졌다. 사랑스런 아내와 아이들이 있던 집은 한줌의 재가 되었다. 사람도 집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저걸 어째? 저걸 어째?”
구름이와 세민이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 때였다. 한 가닥 실오라기 같은 연기가 집터에서 솟구쳤다. 그리고 그 연기에서 음성이 들렸다. 온 몸을 오싹하게 만드는 그런 음성이었다.
“나는 이 집을 지키던 신이었다. 이 집을 오래도록 행복하게 지켜야할 신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외적의 침입을 눈앞에 두고 그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온 가족을 지아비의 칼날에 쓰러지게 했으니 이 죄를 어찌 세월로 씻을 수 있단 말이냐? 나의 분노, 나의 절망, 나의 비참함은 하늘을 찌르고 땅을 가른다. 나의 이 원한은 이제 저주가 되어 온 세상을 떠돌아다닐 것이다.”
긴 말이 들리면서 그 한 가닥 연기가 어디론가 날아가려고 할 때였다.
“가긴 어딜 가?”
“너는 곧 우리의 밥이다. 우리의 기쁨이고 행복이다.”
쥐와 닭이 풀쩍 뛰어서 그 연기를 붙잡았다. 그 원한이 서린 연기를 맛있다는 듯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바로 저것이구나. 악의 무리들은 다른 사람들의 원한이 즐거움이구나.”
“저렇게 해서 악의 무리들은 힘을 기르고 강해지는 구나.”
구름이와 세민이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무엇을,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세민아! 저 불쌍한 계백 장군 가족들의 넋을 수습해서 좋은 곳에 모셔드리자.”
“그래, 그렇게 하자.”
구름이와 세민이는 아직도 검은 연기와 불길이 가시지 않은 계백 장군의 집터 쪽으로 다가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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