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서움에 벌벌 떨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숨이 막힐 듯 잠시 시간이 흘렀다. 계백은 크게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여보! 사랑하오. 그래서 오늘 이 못난 지아비의 뜻을 따라주오.”
말을 하면서 계백의 눈에 이슬처럼 물기가 서렸다. 그걸 감추느라 아내를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알겠어요. 당신의 뜻에 기꺼이 따르겠어요. 아이들이, 아이들이 가엾지요.”
계백 장군의 아내는 이미 결심을 한 듯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이들에 이르러서는 말에 눈물이 섞였다.
“내 이름이 계백이오. 당신도 잘 알지 않소. 전쟁에 지면 알려진 이름의 가족들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죽음보다 더한 치욕과 굴욕,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되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죽음이 백제군 승리의 힘이 되었으면 하지요.”
“나라의 운명은 이미 바람 앞에 꺼져가는 촛불이오. 하지만 난 한 가닥 희망을 갖소. 내 가족, 내 자신에 대한 생각이나 미련을 잊은 뒤 죽을 각오로 싸울 것이오. 당신과 아이들, 내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소.”
계백은 말을 끊었다. 그리고 칼을 뽑아 들었다.
“아버지! 살려 주세요.”
“아버지! 죽기 싫어요.”
그 순간이었다.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전쟁에 지면, 그렇게 전쟁이 끝나면 그 때는 모두 죽게 된다. 더러운 죽음을 기다리지 말자. 아비와 함께 우리들의 죽음으로 백성들의 살길을 찾아 주자.”
“애들아! 아버지의 뜻에 따르자. 따라야 한다. 죽는 게 사는 거란다.”
계백의 아내는 딸 둘, 아들 셋을 차례로 끌어안았다. 등을 다독이며 달래었다.
“여보! 저 세상에서 만나요.”
계백 아내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럽시다.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다시 만납시다.”
지아비로부터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계백의 칼이 날카롭게 반원을 그었다.
“아버지! 아버지!”
“사랑한다!”
뒤이어 아들과 딸, 아버지의 울음 반, 비명 반의 목소리가 한데 섞였다. 계백의 칼날이 그렇게 몇 차례, 번개처럼 빠르게 반원을 그었다. 이내 방안이 조용해졌다.
계백은 한동안 넋을 잃고 방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죽인 칼날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흘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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