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명협정 이원익 왕버들나무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역사를 비틀고 뒤집어 보는 것은, 재미라기보다 바로보기의 한 방편이 아닐까 싶다.
조선 5백 년의 여러 정승 중 백성들이 꼭 정승 호칭으로 존경한 사람은 네 분이다. 첫째가 세종 때 영의정인 황희 정승이다. 두 번째가 역시 세종 때 좌의정인 맹사성 정승이다. 서울의 고갯길 이름 ‘맹현’은 맹 정승이 거기 살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가 명종 때 영의정인 상진으로 서울의 상동 이름도 상 정승이 거기 살았기 때문이다. 네 번째가 오리 정승인 이원익이다.
‘선조의 가훈을 받들어 충효로 마음을 세우고 인과 예절로 몸을 다스리며, 형제간에 화목하고 사리사욕으로 남에게 원한을 사지 말라. 내가 죽거든 절대 후하게 장사지내지 말라. 단지 수의와 연금으로 시신을 싸고, 외관이 있거든 석회를 쓰지 말고 석회가 있거든 외관을 쓰지 말라. 장지는 선영 내의 정한 곳에 입장하라. 초상, 소상, 담제 이후에도 일체 무당과 불가의 행사를 하지 말고 선조께서 소찬으로 진설한 것을 따라라. 풍수가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자손 대대로 한 산지에 장사하여 그 처소를 잃지 않도록 하라. 시제와 속제의 묘제 재물은 풍성과 사치를 숭상하지 말고 단지 정결히 하며 십여 접시에 그치도록 하라. 1630년 11월 21일, 아들 의전과 손주 수약에게 이글을 준다.’
앞글은 오리 이원익(1547-1634) 정승의 유언 내용이다. 오리 정승은 선조, 광해군, 인조 왕 등 3 왕에 걸쳐 64년간 공직에 있으면서 6번에 걸친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지냈다. 임진, 정유재란, 정묘호란의 전장을 누볐고, 조선의 청백리 217명에 이름을 올렸다.
세종대왕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문자를 쓰고 있을까? 오리 정승이 없었다면, 조선은 과연 5백 년 역사를 기록했을까? 이렇게 역사를 비틀고 뒤집어 보면, 세종대왕은 한반도의 문명을 크게 여신분이고, 오리 정승은 민족의 역사를 이어 지키고 세운 분이다.
왜냐하면, 오리 정승이 없었다면 이순신이 없고, 이순신이 없었다면 정유재란에 한양은 단숨에 무너졌을 테고, 조선의 남쪽은 왜가 지배하거나 식민정권이 세워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례의 명협정은 그 정유재란에 오리 정승 이원익이 이순신을 만난 곳이다. 당시 이원익은 영의정 겸 도체찰사로 국가비상사태직무 총사령관이었다. 왕을 비롯하여 모두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때, 이원익은 왜의 코 앞인 전쟁터에 있었다. 이때도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만나기 위해 구례까지 달려간 것이다.
얼마 전 이순신은 극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그 이순신이 원균의 모함으로 국문장에서 사형집행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다. 이원익은 선조에게 ‘전하께서 전시 중에 신(臣)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 중에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해임 못 하옵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선조는 ‘도체찰사가 그리 말하니 이순신이 죄가 없는가 보다’라고 했고, 이틀에 걸친 친국은 마무리되었다. 조선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구례 명협정 옆의 5백 살 넘은 왕버들 나무와 아직도 푸르른 참느릅나무 3그루는 구례로 달려온 이원익이 이순신과 만나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나무이다. 이순신 또한 ‘오리 대감은 누구 보다 앞장서서 나를 믿고 옹호해 주었다. 나 역시도 상국이 오로지 나의 계책을 써 주어 오늘의 수군이 완전할 수 있었다.’라고 했으니, 이로써 오늘의 우리가 일본이건, 누구건,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명협정 5백 년 세월의 왕버들나무와 참느릅나무에게 돌아가신 조상님 모시듯 허리까지 굽혀 예를 갖추는 연유이기도 하다.(호남일보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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