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읍성 이순신 푸조나무
순천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를 두 팔처럼 벌려 남해의 뭍 섬들을 안고 품는 아름다운 고을이다. 그 남해의 여러 고을과 섬마을은 이른 봄이면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고, 매화와 동백, 산수유가 흐드러지게 어우러진다.
하지만 왜의 침입, 그리고 재침입에 피난민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던 1597년 8월 9일이다. 순천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이순신은 이른 아침 길을 재촉하여 낙안에 이르렀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집을 나와 오릿길에 이르도록 장군을 맞이했다.
이윽고 낙안성으로 들어서니, 성의 관리와 마을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반가워했다. 또 적에게 줄 수 없다며 불을 지른 탓에 관청과 창고가 다 타버렸다고 슬피 울었다.
군량미를 얻으러 온 이순신은 순간 온몸의 힘이 쑥 빠졌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을 위로하고 다시 한번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낙안성은 동쪽 금전산, 북쪽 백이산, 서쪽 노강산과 부용산, 남쪽 제석산이 두르고 있는 천혜의 분지형 요새이다. 지형이 그러하니 대개의 성은 평지에서 산기슭으로 이어지나, 낙안성은 그냥 평평한 평야에 쌓은 평지성이자 석성이다.
그날 밤, 마을의 노인들이 술을 독채 들고 왔다. 함께 음식을 나누던 이순신은 바로 가까이 있는 당산나무에 술을 한 잔 부어주었다. 그 뒤 이 당산나무를 ‘장군목’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순신 나무’가 또 있다. 1591년 2월에 정읍 현감이던 이순신은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로 왔다. 이듬해 4월, 왜의 침입으로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이순신은 부족한 수군과 군량미를 모으기 위해 낙안성에 들렸다.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다.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군량미를 실은 마차 바퀴가 삐걱거리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서둘러 마차 바퀴를 수리하여 성 밖으로 나갔다.
큰 다리께에 이르렀다. 그런데 얼마 전 그 다리가 갑자기 무너져버렸다고 했다. 만약에 마차 바퀴 고장이 낙안성의 은행나무 아래가 아니고 다리 위였다면 어찌 됐을까? 이 광경을 지켜본 백성들은 낙안성 은행나무를 ‘이순신 나무’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 한 그루 이순신 나무가 있다. 바로 객사 뒤, 담 곁에 있는 ‘푸조나무’이다.
이 푸조나무는 소금기에 잘 견디기 때문에 주로 남해안에서 자라고 있다. 수백 년을 살며 덩치도 두세 아름 넘게 커져서 바닷바람을 막아준다.
이순신이 이 푸조나무를 낙안성 객사 뒤뜰에 심은 것은 수군재건길을 걸었던 이듬해인 1598년이다.
그해, 10월 14일, 이순신은 순천의 왜교성을 공격하려고 고금도 진지를 나왔다. 낙안성과 가까운 여자만의 섬 장도에 이르렀다.
당시 노루섬이라고도 했던 벌교 앞바다 여자만 장도에는 왜의 군량미 창고가 있었다. 왜병은 이순신의 수군이 온다는 말에 창고를 버리고 도망쳐버렸다. 이순신의 수군은 장도에 상륙하여 왜병의 군량미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이어지는 순천 왜교성 전투에서 왜선 30여 척을 격침하고, 11척을 빼앗았으며, 왜병 3,000명을 무찔렀다.
그 왜교성 전투를 앞두고 낙안성에 잠시 들렸던 이순신이 승전을 기원하며 심은 나무가 바로 객사 뒤쪽의 푸조나무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 몸 한쪽을 잃었지만, 오늘도 이순신의 후예들을 맞아 그날의 역사를 오늘에 전하고 있다. 절로 머리가 숙어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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