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안 여행기

배롱꽃 명옥헌기

운당 2013. 8. 31. 09:31

배롱꽃 명옥헌기

 

Cloud W Kim

 

여름 꽃으로 배롱나무 만한 게 또 있으랴?

그래서 이름도 많다.

붉은빛 나는 수피여서 백일홍(百日紅)나무,

그 백일홍을 부르는 우리 말 배롱나무

당나라 양귀비가 자미성에 많이 심어서 자미화(紫薇花),

나무결이 미끄러워 원숭이가 떨어지는 나무 후랑달수(猴郞達樹),

줄기를 살살 손끝으로 간질이면 간지럼 타듯 떠는 간지럼나무 파양수(爬癢樹),

사람의 손길이 닿으면 부끄러워 비비꼬는 부끄럼나무 파양수(怕癢樹),

줄기가 얼룩얼룩해서 줄기에 옴이 올랐다고 백양수(伯痒樹)

온 집안이 붉은 빛으로 가득하다고 만당홍(滿堂紅),

잎과 꽃이 양반처럼 서둘지 않고 느릿느릿 핀다고 양반나무,

백일홍 꽃이 다 지면 벼가 익는다고 쌀밥나무, 올벼 꽃,

요즈음 세태에 맞는 날씬한 여인의 몸매라 누드나무,

영어로는 Crape Myrtle, 일어로는 원숭이가 미끄러진다는 사루 스베리(猿滑, さるすべり).

 

이름이 많은 건 오랜 세월 사람과 가까이 살았고, 사랑을 주고받았다는 것 아니겠는가?

초여름에 시작해서 가을이 익도록 피어나는 꽃 배롱꽃이다. 귀한 꽃은 아니지만 정감어린 화사한 꽃이다. 꽃말이 떠나간 벗이나 임을 그리워한다지만, 꺼지지 않는 정염이라 해도 어울릴 꽃이다.

 

집안에 심지 않은 나무가 있다.

꽃가루가 낚시 바늘처럼 구부러져 아이의 망막을 다치게 할 수 있다 해서 능소화, 뱀이 올라간 것처럼 꼬여서 만사가 뒤틀릴지도 모른다 해서 등나무, 꽃이 너무 화사해서 아이들의 감정을 흔들지 모른다 해서 복사꽃, 나무결이 미끄러워 아이들의 낙상을 우려하는 배롱나무가 있다.

 

하지만 봄날의 벚꽃과 복사꽃, 여름의 배롱꽃, 가을의 만산홍엽은 사람의 마음에 폭풍우를 일으키고 뇌성벽력을 치기도 하는 금수강산의 대표적 꽃임에 분명하다.

 

말로만 듣던 열대야가 이제 여름날에는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흰구름 나그네가 열대야를 피해 그 여름 꽃 자미화를 만나러갔다.

전남 담양 고서에 있는 명옥헌원림이다. 언제 가 봐도 고즈넉한 그 분위기가 좋지만, 자미화 피는 한 여름이 가장 좋은 명옥헌원림이다.

 

사육신으로 38세에 형장의 이슬이 된 성삼문 선생이 이 자미화를 시로 피워낸 게 있다.

 

作夕一花衰 (작석일화쇠, 지난 저녁 꽃 한 송이 떨어지고)

今朝一花開 (금조일화개, 오늘 아침에 한 송이 피어서)

相看一百日 (상간일백일, 서로 일백 일을 바라보니)

對爾好銜杯 (대이호함배, 너를 대하여 좋게 한잔 하리라)

 

흰구름 나그네, 구름집인 운당(雲堂), 하지만 구름을 부르거나, 만들지도 못하는 허술하고 서투른 엉터리 운당이 이글을 쓰고 있다.

지난 밤, 모처럼 50여일 만에 성난 하늘이 물동이로 비로 퍼붓고, 뇌신을 불러 번개칼을 휘둘렀으니 양귀비가 사랑한 자미화가 그대로 성케 있을까 싶다.

 

성삼문 선생 흉내 내어 배롱꽃 시 한 수 적는다.

 

자미화

 

그대 이름이 무언들 나그네에겐 정염이다

소녀처럼 부끄럼 타는 그대 기대어 앉으니

지고 피는 꽃송이 푸른 하늘 꽃구름이다

어디서 어떻게 살까?

지난 사랑은 백과사전에도 없다

어제는 몰랐던 그대

오늘은 그대가 내 사랑이다

내일도 오늘이려니, 그 사랑이 백날이 되려니

 

 

 <그대는 정염의꽃이라>

 <땅에도 하늘에도 물속에도>

 <기와가 아닌 초가여도 좋으니 삼칸 집 하나 있으면>

 <기둥이 좀 구부러져도 좋으니>

 <지붕이 높지 안아도 좋으니>

 <삼칸 집 미련 버리고 다시 꽃을 본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그대 사랑이 백년은 가리라>

<여름 날 담양을 지나는 길에 고서의 명옥헌 원림에도 눈맞춤 하시라>

'나라 안 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화 향기를 찾아서  (0) 2014.04.04
금강은 흘러 군산항과 만난다  (0) 2014.03.29
2013년 마곡사  (0) 2013.08.26
여름 어등  (0) 2011.07.04
함평천지 군유산  (0) 2011.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