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산동 계척 할머니 산수유
구례 계척 마을이 있는 산동면은 1,732m의 반야봉과 만복대, 노고단, 깃대봉, 견두산이 둘러싼 산골이다. 이곳의 봄은 온 산천을 노오랗게 물들이는 산수유꽃으로 시작한다. 그저 하늘만 빼놓고 온 산야가, 심지어 흐르는 시냇물까지도 노오란 산수유 꽃 빛이다.
전국 생산량의 60%인 이곳 구례 산동의 산수유는 신비의 약재다. 이른 봄 연노란 꽃이 피어, 꽃이 적은 시기에 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가을에 붉은 열매를 대롱대롱 맺는다. 구기자와 비슷하나 조금 작은 대신 더 단단하고 야무지다. 이 산수유 씨앗에 독성이 있어 제거하는데, 예전에는 사람이 이로 일일이 발라냈다 한다. 그저 쉬운 결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에 숨은 노력과 정성이 담겨있으니, 산수유 한 알에도 삶의 진리와 깨달음의 근원이 있다.
여기 산동면 계척 마을에는 우리나라의 산수유 시초가 되는 산수유 시목이 있다. 조선 선조 때에 임진왜란을 피하여 오 씨와 박 씨가 들어와 마을 이름을 ‘계천(溪川)’이라 했다. 그러다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냇물이 계수(桂樹)나무처럼 생겼다 하여 ‘계(桂)’자와 임진왜란에 베틀바위 안에서 베를 짜서 자로 재었다 하여 자 ‘척(尺)’자를 써서 ‘계척(桂尺)’으로 바꾸었다.
그보다 더 오래인 1000여 년 전이다. 중국 산수유의 주산지인 산동성에 살던 처녀가 이곳 구례로 시집을 왔다. 그때 고향 풍경을 잊지 않으려고 산수유나무 한 그루를 가져와 심었다. 바로 여기 계척 마을의 높이 7m, 둘레 4.8m의 산수유나무가 그 나무이니, 시목나무이자, 할머니나무이다. 산동면은 산수유 시목을 가져온 처녀의 고향 이름이다. 아직도 봄이면 노오란 꽃으로 꽃구름을 이루는 이 산수유나무가 천여 년 자손을 퍼뜨리며 이곳 사람들의 생계를 도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곳에 산수유 시목 공원이 있다. 가운데 분수광장을 만들고 한반도와 중국의 지형을 형상화하고 외곽에는 만리장성 모양의 성벽까지 축조하였다.
더하여 1597년 정유재란 때,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이 수군 재건 길에 나선 곳이 여기 구례임을 알리는 조형물도 설치하였다.
하지만 그때 이순신이 이곳 계척 마을에 들렸다는 기록은 없다. 당시 이순신은 남원에서 여원재를 거쳐 운봉으로 갔다가 다시 여원재로 되돌아와 구례로 왔다. 이순신이 운봉으로 간 것은 백의종군 지인 합천 쪽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도원수 권율이 구례로 온다는 소식에 발길을 다시 구례로 향한 것이다.
그렇게 이순신과 구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백의종군 중 구례에서 여러 날 묵으며 전시 상황을 판단하고, 왜를 물리칠 계책을 세웠으니 우연이 필연이 된 것이다. 당시 구례 현청의 명협정, 5백 살 왕버들나무와 느릅나무, 그리고 손인필 군관 집터와 이순신 바위 등의 유적이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또 수군 재건 길에 나선 곳도 이곳이다. 진주 수곡에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구례로 왔고, 손인필 부자 등과 더불어 명량대첩의 첫발을 디딘 곳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여기 계척 마을의 천년 산수유 시목이 있는 곳을 이순신 백의종군과 수군 재건의 기념지로 하는 것은 합당한 대우이고, 자랑스러움이다. 살아서 손가락질받는 일도 있지만, 천년이고 만년이고 세월이 흐를수록 빛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옳고 그름으로 나누거나 가르는 것이 아니고, 옳다고 생각함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다. 천살 할머니 산수유나무 앞에서 삼가 옷깃을 여며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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