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

강릉 허난설헌 옛집 허균 향나무

운당 2023. 3. 17. 08:02

누군들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을까? 호랑이는 가죽을,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지만, 이름에 영웅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으면 금상첨화이리라. 하지만 허균은 영웅이라기보다 풍운아이다. 아니다. 투사이자 전사가 아닐까? 싶다. 그렇더라도 허균은 이름을 남기려고 살았던 얄팍한 인물은 아니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불꽃처럼 살다간 진정한 혁명가였다.

허균의 호는 교산(蛟山)이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교()라 하나, 허균은 용이 되기 전의 이무기였다. 강릉 경포대에서 북쪽으로 차 한잔 마실 거리인 사천진해변의 꾸불꾸불한 앞산이 교산이다. 또 이곳의 교문암(蛟門岩)은 교산의 구룡과 사천의 내가 바다로 들어가는 백사장의 큰 바위였다. 연산군 7년에 내가 무너지자 늙은 교룡이 바위를 두 동강이로 깨뜨리며 승천할 때, 문과 같은 구멍이 뚫렸다는 바위이다.

여기 교산 자락 아래 사천진리 151-1의 애일당은 허균의 외가이자, 태어난 집이다. 외할아버지 김광균이 늙은 어머니를 위해 창을 열면 동해의 해돋이를 볼 수 있게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강릉 김씨 아들을 얻기 전에는 그 집에서 외손을 잉태시키지 않으려 했으나, 허엽에게 출가한 첫째 딸이 허봉과 허균을 낳았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다. 24살의 허균은 왜적을 피해 어머니를 모시고 함경도로 갔다가 이곳 교산으로 돌아왔다. 이때의 일이 문집 성소부부고애일당기에 있다.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폐허나 다름없이 황량해진 외할아버지의 옛 집터 애일당을 깨끗이 청소하고 다시 일으켜 세운 후 거처로 삼았다. 마침내 오대산의 정기와 이무기의 정기가 합해 모인 바로 그 명당 지맥의 주인이 되었다.’

허균은 이 무렵 바위를 깨트리고 승천한 교문암의 교룡이 되고자 했지 않았나 싶다. 당대의 명문가 집에서 태어나 명석한 두뇌와 시대를 보는 안목을 지녔으니, 바위 밑의 엎드린 이무기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으리라. ‘성소부부고의 유재론과 호민론은 그의 정치사상이자, 치세의 방향이다.

허균은 유재론에서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한 시대를 위함이니, 인재를 버리는 것은 하늘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호민론에서는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백성이다.’윗사람의 부림을 당하는 사람은 항민(恒民)이고,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은 원민(怨民)이며, 시대적 변고에 자기 소원을 실현하려는 사람은 호민(豪民)이다. 이들 중 항민과 원민은 두렵지 않으나, 호민은 두려워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최초의 한글 소설인 그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은 그가 세우려는 이상 국가이며 그곳의 왕 홍길동은 바로 자신이었다.

허균은 어릴 적 유성룡에게 학문을 배운 다음, 둘째 형의 친구인 손곡 이달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달은 서자 출신으로 서얼금고법 때문에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이는 허균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을 터이고, 결국 서자 출신 심복 현응민의 광해군을 제거한다는 격문에 연루가 되어 역적이 되었다. 그리고 사형은 세 번 심리한다는 삼복계 절차도 없이 능지처참형으로 쉰 살의 삶을 마감했다.

강릉 허난설헌 생가는 허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이곳 문간채가 달린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앞 정원에 교문암 아래 웅크렸던 교룡처럼 꾸불꾸불한 향나무가 있다. 허균이 말한 호민이 그 향나무를 촛불처럼 들면 용은 바위를 깨트리고 승천하리라.

허균 향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