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 옥녀봉 사랑의 느티나무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살만한 곳’을 ‘지리, 생리, 인심’이 좋고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이는 지형, 토양, 기후, 물산, 일자리, 전통과 풍속, 또 사농공상의 사민이 평등한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택리지를 탈고한 곳이 강경의 팔괘정으로 송시열이 이황과 이이를 추모하고 제자들에게 강학하던 곳이다. 또 스승 김장생이 학문을 펼친 곳이 이웃 임리정이니, 강경은 노론들의 본거지였다. 당시 소론 학자로 노론의 핍박을 받은 이중환이 여기에서 집필하고 발문까지 마무리한 것은 강경이 살만한 곳 중 으뜸이라는 것 외에 나아가서는 학문평등, 사민평등의 바람이고 실천이었으리라.
논산시 강경읍은 부여 백마강이 남진하다가 크게 휘돌아가며 서진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 강경포구에서 발걸음을 멎는 논산천과 강경천을 받아 금강이 된다. 논산시 채운면의 미내다리는 조선시대의 무지개 모양 돌다리로 강경천을 건너는 주요 길목이었다.
또 강경은 동해안의 함경남도 원산항과 더불어 서해의 수로와 육로를 잇는 ‘조선의 2대 포구’였고 대구장, 평양장과 함께 전국 3대 장이었다. 일제강점기 초까지 100여 척의 배가 드나들며 금강이 생명 터인 사람들의 농산물과 전국 각지의 상품을 유통시켰다. 그리고 충청남도에서 최초로 전기가 들어왔고, 매년 10월 중순에 강경발효젓갈축제가 열린다.
이곳 강경 포구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해발 44m의 야트막한 바위산 옥녀봉에는 해조문이 있다. 해조문은 강경포구를 이용하는 어민들에게 밀물과 썰물의 날짜와 시간 등 물의 현상을 알려주는 총 170자로 수록한 암각화로 우리나라의 유일한 유적이다.
이 옥녀봉의 옛 이름은 강경산이다. 아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딸이 이 산 아래 맑은 강물에서 목욕을 하고 놀았다. 그러다 돌아갈 시간에 쫓겨 옷을 제대로 챙겨입지 못했고, 이를 본 옥황상제는 하늘을 비춰주는 거울을 던져주고 하늘 문을 닫아버렸다. 그 뒤 거울만 들여다보다가 죽은 옥황상제의 딸은 옥녀봉의 바위가 되고, 거울도 바위가 되었으니 용연대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백제가 역사를 승자에게 내준 것처럼 여기 강경과 논산은 전라북도 땅이 충청남도가 된 곳이다. 박정희 군사 정권이 들어선 1963년 11월 21일이다. 전라북도 금산군과 논산, 역시 강경이 있는 전라북도 익산시 황화면이 충청남도가 되었다. 과거 나라와 지역의 경계가 산줄기나 강이었고, 금강 물줄기 아래가 모두 호남이던 것을 하루아침에 바꾸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흐르는 곳이 어느 도에 속하는지 알 리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강경의 금강이다. 과거의 영광이나 화려함에 무슨 미련이 있을 거냐? 그 과거를 반추하되 다시 딛고 일어나는 게 희망이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것이다. 조선의 2대 포구, 3대 시장의 빛나는 이름은 이제 옛 이름이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흐르는 강경의 시간이 멈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해 질 무렵 옥녀봉에서 도도히 흘러가는 금강을 바라본다. 이곳의 석양 노을은 황홀하다는 표현밖에 할 말이 없다. 또 이 석양은 내일을 여는 여명이다. 그 황금빛 노을과 새벽을 여는 여명까지 품은 강경의 금강은 마치 한 가닥 비단 자락을 펼쳐놓은 것 같다. 강은 산을 넘지 않는다. 산을 오르지도 않는다. 비단 자락 금강은 그 지혜롭고 아름다운 생명의 강이다.
여기 옥녀봉의 두 아름 느티나무는 사랑나무라는 이름이 있다. 방향을 잘 잡아 쳐다보면 아래쪽 늘어진 가지 모습이 하트 모양이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메마른 대지를 적셔주는 젖줄 금강을 수수만년 함께하니, 그 젖줄의 젖무덤을 어찌 사랑이라 하지 않을 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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