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고을 광주 옛터를 찾아서

조시미 고개를 아시나요?

운당 2015. 9. 20. 12:37

<빛고을 광주 옛터를 찾아서>

 

조시미 고개를 아시나요?

-20006, 옹기 굽던 원제 마을을 찾아서

 

1. 20006

저 고개가 조시미라오. 왜 조시미냐? , 도둑놈이 많았던가봐. 그래서 조심하라고 조시미 고개라고 했어.”

지금은 산허리를 잘라내고 지상 80m의 높이에 두 산등성이를 잇는 아름다운 다리가 걸렸다. 백운동을 우회하며 진월동에서 봉선동으로 넘어가는 그 고갯길을 가리키며 올 해 나이 여든의 안상신 노인이 말씀하신다. 젊은 시절 일본에 건너갔다가 대동아전쟁 때 죽어도 고향에서 죽겠다고 돌아와 여기 원제마을에서 평생을 살고 있는 분이시다.

나도 젊은 시절 돼지를 잃어버리고 찾아 나섰지. 그런데 도둑질 했으면 끝까지 가져가야지. 죽여서 던져버리고 갔어. 불쌍하게.”

도시화 되어가는 도시의 변두리에서 고향을 지키는 분답게 말씀 하시는 눈빛이 맑은 하늘 그대로다.

원제마을옛 이름은 점촌이었다고 한다. 광주시로 편입되기 전에는 광산군 효지면으로 바로 마을 앞에 면사무소가 있었다며 바라다 보이는 감나무를 가리키신다. 그 면사무소는 6.25때 인민군의 방화로 소실되고 그 뒤 금당산 아래로 옮겨갔다고 한다.

그릇 굽던 굴이 바로 저곳에 있었어. 굴은 두 개였지.”

굴이라고 부르는 가마터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내가 어릴 적에도 굴이 있었으니까, 그릇을 구운 역사는 백년도 더 되었을 거야. 없어진 지는 한 20년 되었지.”

여기서 굽던 그릇은 옹기였다. 그릇이나 가마터하면 우리는 얼른 청자나 백자가 떠올려진다. 하지만 여기서 굽던 그릇은 밥상에 오르는 사기그릇도 아니었다. 30년 전만해도 달구지나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팔던 붉은 빛 감도는 검은 그릇, 바로 장이나 된장을 담아두는 우리네 장독대의 주인이던 크고 작은 그릇, 바로 그 옹기 항아리였다.

어릴 때 보니까, 기술자를 사와서 그릇을 구웠어. 그릇 만드는 진흙은 여기서 나오지 않았어. 비아나 나주 산포에서 가져왔지.”

광주시의 인구가 불어나면서 옹기항아리의 수요가 부쩍 늘었을 것이다. 그래서 광주 인근에 그릇의 수요를 감당할 가마터가 필요했고, 그 적지로 이곳 점촌에 가마터가 만들어졌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옹기그릇의 수요가 점점 줄면서 이곳 가마에선 새롭게 수요가 늘기 시작한 화분을 옹기항아리와 함께 구워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시대의 변화를 이겨내진 못했다.

1970년 시작된 새마을 사업의 바람이 이곳에도 불어왔고, 1972년 새마을 사업이 강하게 추진되면서 옹기항아리는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가마도 더 이상 불을 피우기 힘들어진 것이다.

점촌 마을이라 했던 이곳 원제마을, 당시에는 그릇 굽는 상민이 사는 마을이라고 괄시를 받았을 옹기항아리 마을이다.

 

효덕동 쪽에 그릇 굽던 마을이 있었지.’

그렇게 옛 기억을 떠올리며 그 그릇 굽던 원제마을을 찾았을 때다.

마악 무더워지는 날씨였다. 효덕초교 옆 시내버스정류장에서 용산동 방향으로 7, 8분 거리에 도시도 시골도 아닌 마을이 있었다. 한쪽의 도시의 상징 우람한 아파트가, 다른 한 쪽인 6, 70년대를 짓누르듯 우스꽝스런 모습이었다.

마을 앞에 아담한 정자와 사당이 있었다. 사당에는 청주 한씨의 충효비가 모셔져 있었다. 야금야금 잠식해오는 고층아파트를 마치 성문처럼 막고 서있는 그 정자와 사당에서 시멘트만 발라진 고샅길로 들어가 백여 보 걸으니 당산나무가 우뚝 서있다. 한가로운 노인들도 당산나무와 있었다.

수령 3백년이 넘어 보이는 그 아름드리나무 아래 당산이란 돌비가 서있고, 그 옆에 경로탑도 있다.

무등산 정기 받아/ 우리 조상 터를 닦고/ 오륜지도 본을 끼쳐/ 후손에게 전하더라./ 갸륵하시다 높은 그 얼/ 이어받아 3백년/ ! 진제여/ 우리의 긍지여!’

노인들은 윷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 윷놀이가 끝나기를 기다려 노인들에게 다가가 가마터의 역사에 대해 물었더니, 손을 휘저으며 말한다.

우리 진제마을은 그릇 굽는 마을이 아니야. 저기 산 밑 원제마을이 그릇 굽던 마을이야.”

아마 굴이 두 갠가, 세 갠가 있었어. 천민들이 했던 일이라 잘 모르겠어.”

노인들은 천민들이 했던 일이라 잘 모르겠다하면서도 원제마을로 가는 길은 눈 감고 가도 될 만큼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렇게 찾아간 점촌마을, 아니 이제는 그 천대받던 이름을 벗어던지고, 가마터마저도 잊혀져버린 원제마을은 6월의 햇살 아래 평화로워보였다.

한 번 굴에 가봐. 지금도 그릇 조각이 많이 있어.”

어르신! 고맙습니다.”

얼굴 어디에도 천민이란 흔적이 없는 안상신 어른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그릇을 구웠다는 마을 위쪽에 있는 가마터로 갔다. 하지만 잡초 우거진 산등성이에 어지럽게 나뒹구는 깨진 그릇 조각만이 옛 가마터자리였다는 걸 짐작케 할 뿐이다.

바로 그 길로 산을 넘으면 절이 나와. 그래서 부채울길이라고 해. 부처님을 모신 절로 가는 길이라는 말이야.”

안상신 어른의 말씀을 등에 얹고 가마터에서 부채울길을 걸어 제석산에 오르니 봉선동, 방림동 사람들이 자주 오르는 등산로와 만난다.

천민들이라 하시 받으면서도 묵묵히 그릇을 굽던 점촌마을 사람들, 그 투박한 옹기의 장맛, 된장맛을 보게 해주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살까? 그 감칠맛 나는 투박한 항아리 생각으로 잠시 걸음을 멈추니, 이마에 돋은 땀방울에 바람이 느껴진다. 첫 여름의 시원한 솔바람이 지난 세월일랑 한 순간의 꿈이라고 속삭이며 조시미 고개 쪽으로 달려간다.

 

2. 20159

1993년부터 틈날 때마다 광주의 옛터를 찾아다녔다. 계간지 예술광주에 싣기 위해서였는데, 조시미 고개가 있는 진제와 원제마을을 찾았던 때는 20006월이다.

그리고 15년만이다. 2015920일 일요일 아침, 다시 그곳을 한 바퀴 휘돌았다.

이제 두 마을은 옛 모습을 거의 다 벗어버리고, 도시의 민낯으로 변신을 했다.

청주 한씨 충효비를 모신 사당은 어디로 갔을까?

맞아! 잠시 나그네에게 엉덩이를 내려놓게 하던 아담한 그 정자도 없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봤는데 어디로 갔을까?

 

그리 쓸쓸해하며 당산나무를 찾았는데, 당산나무만은 아파트 공사에도 살아남아 여전히 당당하였다. 그러나 경로탑은 보이지 않고 담벼락 벽화 옆에 생뚱맞은 금수강산 풍월이 적혀있었다.

당산나무 뒤로 아파트가 들어서고 또 그 뒤로 진제초등학교가 생겼다. 사라져버린 정자는 그곳에 있었다. 진제도담공원이 생기고, 정자는 진제미화정이란 이름도 달고 있었다. 공원 규모는 작지만, 암석정원을 비롯하여 여러 화초와 수생식물까지 골고루 갖추어 놓았다.

초등학교 옆의 도담공원이라? 우리 아이들이 야무지고 탐스럽게 자라라는 마음을 담아 만든 공원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제 양반이 살던 진제마을과 옹기 굽던 상민이 살던 원제마을은 역사의 뒷길로 사라져버렸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했던가?

 

그마나 옛 모습이 조금 남아있는 골목길로 진제마을을 돌아 나오니, 지난 U대회를 치른 진월국제테니스장이다. 이어 원제마을로 가니, 그곳엔 그냥 통째로 아파트가 들어섰다. 또 아파트 앞에는 체육관 공사가 거의 마무리단계다. 남구다목적체육관이라 한다.

체육관 공사장 앞에서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옛 원제마을과 제석산을 바라본다. 15년 전, 그리고 오늘 제석산 무지개다리는 여전하다. 덩실 공중에 매달려 흐르는 세월을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한 바퀴 휘 둘러 돌아오는 길, 한 여름을 넘기며 무성히 자란 연잎이 덮어버려 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저수지에서 잠시 발을 멈췄다.

1980524일이다. 광주민주항쟁을 무력진압 키 위해 광주에 온 공수 제11특전여단 일부 병력이 이곳 원제와 진월마을 앞 저수지 진월제를 지나칠 때였다.

왜 그렇게 이성을 잃었을까? 그 광기와 분노는 무엇일까?

1230분경, 11특전여단 공수대원 중 누군가가 마을 어린이 15명과 함께 저수지에서 목욕을 하던 당시 전남중 1학년 방광범에게 조준 사격을 가했다. 마치 총에 맞은 오리처럼 방군은 즉사하였다.

잠시 뒤 13시경, 그 진월제 아래 진제마을 앞 쪽이다. 효덕국민학교 4학년 전재수가 지나가는 군인을 보고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무차별 사격이었다. 전군은 총에 맞아 그 충격으로 저만큼 튕겨나며 즉사하였다. 벗겨져버린 고무신 한 짝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충분히 상대방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다. 그런데 왜 아이들에게 총을 쐈을까?

 

당시 효덕국민학교 교사였던 한 선생님은 지금도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가슴이 벌렁거린다고 했다. 전재수의 책상 위에 놓아주었던 장미꽃이 피로 변해 홍건이 책상을 적시는 환상에 숨이 막힌다 했다.

 

외적을 향해 겨눠야할 총부리다. 그런데 왜 생명을 지켜줘야 할 내 조국의 아이들, 더욱이 비무장의 아이들을 무참히 살육했을까?

그 답을 아는 자가 우리 사회에 누가 있을까? 도적들이 지키던 조시미 고개는 알까? 창조라면 끓이는 능력의 반신반인족이 알까?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생각에 몰두하다가 하마터면 쉴 새 없이 오가는 차에 치일 뻔했다.

허야! 참새가 백로의 깊은 뜻을 어찌 알거나? 그저 오늘 저 빛나는 태양을 보는 것에 감사하자. 매사에 조심조심!’

그리 체념하고 길가에 무심히 핀 작은 꽃 한 송이를 꺾어 진월제 저수지에 던지는 것으로 그 해답을 삼았다.

지금 살았으면 40대 후반, 50대가 되었을 그 전재수, 방광범 두 영령에 평안있으라! 그리 추념하였다.


<아파트에 살아남은 진제마을 당산나무, 당산나무 표지석과 제단은 그래로였다. 경로탑은 어디로?>

<금수강산 삼천리에 풍년노래 들려오면, 경로탑은 어디가고 사물놀이 흥얼만 남았느뇨?>

<진제미화정, 잡것들 말고 개그우먼 김미화가 뜬금없이 보고잡다.>

<진제초등학교 아이들을 축복하는 도담정원. 암석정원 뒤에 작은 공연장과 미화정이 있다.>

<청주 한씨 충효비는 어디로 갔을까? 진제마을 골목길>

<골목길을 나오면 진월국제테니스장이다>

<진제마을 전경>

<U대회를 치른 진월국제테니스장>

<진월제 저수지>

<15년 전 2000년의 옛 원제마을 사진>

<통째로 사라져버린 원제마을 아래 체육관 신축공사>

<조시미 고개 무지개다리. 사진 오른쪽이 옹기굽던 원제마을>

<2000년의 조시미 고개 무지개 다리.>

<518민주항쟁 때 계엄군 공수부대원의 총기학살이 있었던 진월제. 왜 쏘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