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뉘엿뉘엿 서쪽 바다로 들어가는 황혼 무렵이었다. 한라산 사슴들은 꼭두새벽이나 황혼 무렵에 산기슭의 풀을 뜯고 이곳 백록담 못에 와서 물을 마셨다. 이 사슴 떼를 이끄는 건 눈부신 흰털을 가진 아름다운 사슴이었다.
“나무꾼이 그 흰 사슴이 이끄는 사슴 떼를 발견했지.”
마침 달이 솟았다. 하늘에도 바다에도 연못에도 달빛이 곱게 번졌다. 그리고 수 백 마리의 사슴들이 연못 주위에 가득 찼다.
나무꾼은 연못가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가지고 있는 활을 꺼냈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마리의 사슴을 겨누고 시위를 팽팽히 당겨 화살을 쏘았다.
화살에 맞았는지, 사슴이 푹 고꾸라졌다. 나무꾼은 바위틈에서 나왔다. 쓰러진 사슴을 찾으러갔다. 그러다 깜짝 놀라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어허! 네 이놈! 어찌 죄 없는 생명을 죽이느냐?”
흰 사슴이 갑자기 흰 머리에 흰 수염이 가슴까지 드리운 노인이 되었다. 그리고 나무꾼의 앞을 가로 막았다.
노인의 부드러우면서도 매서운 호통소리에 나무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겁에 질려 얼굴이 새파래졌다.
“이 세상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한 거다.”
그렇게 말한 노인은 백록담 못의 물을 떠와 화살에 쓰러진 사슴의 상처에 발랐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사슴이 벌떡 일어났다.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아물고 죽음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너희 어머니에게도 저 물을 가져다 드리렴. 그러면 병이 나을 것이다.”
나무꾼은 노인의 말대로 백록담 못의 물을 떠다가 어머니에게 드렸다. 그랬더니 어머니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못을 백록담이라고 부르지. 흰백, 사슴록, 못담 그러니까 흰 사슴이 놀던 못이란 뜻이지.”
“그렇구나.”
구름이와 세민이는 백록담 까마귀의 얘기에 푹 빠져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제주는 신비롭고 신령스런 곳이야. 그래서 설문대 할망의 혼령도 만나 뵐 수 있어. 자, 날 따라오렴.”
백록담 까마귀가 앞장을 섰다. 구름이와 세민이를 외돌개 바위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바로 여기야. 설문대 할망은 막내아들 외돌개 바위와 함께 살고 계셔. 자, 그럼 내가 먼저 간다.”
백록담 까마귀가 외돌개 바위 아래 바다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세민아! 무서워? 우리도 바다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안 무서워.”
구름이의 물음에 세민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리도 백록담 까마귀처럼 바다 속으로 들어가자.”
구름이가 풍덩 바다로 들어갔다. 세민이도 망설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