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능주 고을에는 조광조와 얽힌 설화 한 편이 남아있다.
발광정(發狂亭)의 지명에 얽힌 얘기다.
정암(靜庵) 조광조는 1482년에 출생하여 이십 팔세에 진사시(進士試)에, 삼십 삼세에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하였다. 젊은 나이로 당대 성리학의 대가(大家)가 되어 젊은 선비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어 과거에 급제한지 오년 만에 삼십 칠세의 젊은 나이로 종이품(從二品)인 대사헌(大司憲)에 올랐으니 파격적인 출세였다.
그러나 반대파의 모함과 계략에 걸려 정암은 능주로 유배를 왔으니 그의 나이 37세 때인 1519년 11월 15일이었다. 그가 북풍한설 몰아치는 적막하고 쓸쓸한 능성현 남정리(南亭里)초막에서 분한(忿恨)을 가슴에 안은 채 나날을 보낼 때다.
하루는 답답함에 산책을 나가 가까운 비봉산(飛鳳山) 밑을 거니는데 한 늙은 노파의 대성통곡 소리가 들렸다. 손자가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고 몸부림치며 우는 것이었다. 연유를 물으니 ‘이 늙은이가 아들을 일찍 잃고 단 하나 남은 손자를 기르며 살았는데, 그 손자가 조금 전에 병에 걸려 죽었다오.’ 하며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정암이 그 애절한 사연을 듣더니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더니 갑자기 크게 호통을 쳤다.
“너 이놈 역신도 정이 있어야 하거늘, 어찌하여 이처럼 딱한 사람까지 잡아가느냐?”
이에 아이를 잡아가던 역신이 놀라 엎드려 말했다.
“대감께서 이 고을에 오신지라, 이제 물러가려는 길인데 짐을 싣고 갈 나귀가 없어서 이 아이를 짐꾼으로 데려갑니다.”
“그렇다면 내가 타고 온 나귀가 있으니 이 나귀를 이용하고 그 아이를 되돌려 주어라.”
“대감의 명이 그러하니 따르오리다.”
아이들 잡아가던 역신이 정암의 호통에 눌려, 아이 대신 나귀를 가져갔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살아나고 나귀는 3일 간이나 먹이를 전혀 먹지 않았다. 눈도 뜨지 않고, 신음하더니 4일째 되던 날부터 다시 먹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인근 사람들이 병이 나면 정암의 처소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정암이 써준 부적을 얻어 문에 붙여두면 모두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비봉산 아래에 있는 그 지명을 발광정(發狂亭)이라 했다 한다. 노파가 미치도록 울어서 발광인지, 정암의 마음이 미칠 것 같아서 발광인지 지금은 소나무 사이에 잡초만 무성하니 그 발광정이 어딘지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정암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히 여기는 민초들의 한탄이 그런 소생설화, 역귀를 물리치는 얘기로 남았으리라 짐작만 할뿐이다.
<양팽손 선생 산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