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

가거도 후박나무

운당 2022. 11. 21. 08:11

가거도는 섬이다. 동경 125° 07´, 북위 34° 04´로 한반도 최서남단이니 해가 가장 늦게 지는 곳이다. 오래전 아름다운 섬가가도(嘉佳島·可佳島)’라 하다가 1896년 무렵 황금어장인 걸 알고 가히() 살기() 좋은 섬가거도(可居島)’라 했다. 가거도에 가거든 오지 말고 살라는 섬이라고도 하는데, 일제강점기에 소흑산도가 됐다가 해방과 함께 이름을 되찾았다.

해안 백사장에 유리 원료인 규사가 풍부하고, 한여름에 산거머리가 있는 숲은 원시림의 비경이다. 겨울에도 콩난, 일엽초, 고비 종류가 우거지고 달래가 지천이며, 유난히 붉은 천남성 열매와 천리향, 굴거리, 동백, 후박나무로 숲은 늘푸름이니 난대수림의 보고이다.

최부의 표해록, 유몽인의 어우야담 기록처럼 임진왜란 무렵엔 무인도였고, 그 전후에도 왜구 때문에 사람이 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곳에 선사시대의 유물인 돌도끼, 돌바늘, 패총 등이 있으며 섬 북쪽의 등대로 가는 길에 그 유적지가 있다. 또 거센 바람을 피해 100여 종의 철새가 쉬어가고, 제주해류의 바다에서는 봄엔 조기잡이, 가을엔 멸치잡이로 불야성이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는 무섭다. 거센 파도가 장군봉을 넘어 마을 깊숙이 날아오고, 방파제에 있던 64톤짜리 테트라포드를 선착장까지 날렸다. 201188일 태풍 무이파 때의 일이다.

섬들 중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독실산(犢實山, 639m)은 송아지 열매산의 이름처럼 야생 소가 송아지를 낳아 키우는 산이다. 이 산에 올라 바라보는 섬등반도의 풍광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광과 상관없이, 독도가 동해의 지킴이인 것처럼 가거도는 서해의 파수꾼이다. 나아가 대양으로 나아가는 뱃머리이니, 위치만으로도 보석이요, 보물이다.

그렇게 어디를 둘러봐도 한 폭의 그림 같은 가거도지만, 가거도의 수호신인 회룡산에 오르지 않고는 가거도에 다녀왔다고 할 수 없다. 이곳 회룡산 선녀봉에서는 거센 파도와 바람을 막아주는 장군봉과 크고 작은 두 녹섬이 감싸주는 가거도항과 마을이 한눈에 보인다.

이 회룡산에 전설이 있다. 용궁의 왕자가 이곳 회룡산에서 공부를 할 때였다. 하늘의 선녀들이 가거도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잠시 머물렀다. 역시 이들 선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용궁의 왕자가 선녀들과의 만남에 공부를 잊었다. 이에 불같이 화가 난 용왕은 왕자 대신 호위 무사를 장군봉으로 만들어 버렸다. 선녀들은 바닷가의 장군봉을 보며 눈물을 흘리다 하늘로 올라갔으니, 그 뒤로 이 산을 회룡산이라 하고 선녀가 올라간 봉우리는 선녀봉이라 했다.

이야기가 좀 허술하고 줄거리도 밋밋하다. 더하여 이제 용궁의 왕자와 선녀도 없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바라보는 장군봉은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우니 가거도항의 수호신임이 틀림없다.

가거도에는 음양곽, 현삼, 목단피, 갈근 등 희귀 약초가 자생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후박나무는 전국 생산량의 70%라고 한다. 가거도항에 내려서 산을 바라보면 이 후박나무가 원시림으로 덮고 있다.

이 후박나무는 녹나뭇과에 속하는 상록 교목으로 반들반들하고 깨끗한 잎과 나무껍질이 두터워 후박이라 한다. 브로콜리를 닮아 브로콜리 나무라고도 하며 쏭긋쏭긋 나오는 새순이 단풍처럼 붉어 예쁘다. 웅장하고 울창하게 우거진 후박나무 숲이 해 질 녘 석양빛에 반짝이는 모습은 신비롭다. 또 최근 수요가 급감했지만, 후박껍질에서 추출한 약재는 식중독 원인균인 장염비브리오와 비브리오 패혈증균에 우수한 항균작용을 보인다고 한다.

그러니 이 후박나무 원시림을 보고 그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가거도는 아름답고, 가히 살만하며 가볼 만한 섬이다.

가거도 후박나무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