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

장수군청 논개 의암송

운당 2022. 11. 5. 07:42

조선 7년전쟁인 임진·정유왜란에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인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음력으로 622일부터 29일까지 벌어졌다. 이때 진주성의 민관군은 끝까지 항거했으며, 주논개는 당시의 상황을 표상하는 인물이다.

주논개(1574~1593)는 전라북도 장수군 덕유산 육십령이 시작하는 계내면 대곡리에서 선비 주달문과 밀양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15살이던 아들 대룡을 괴질로 잃고 얻은 귀한 딸이다. 출생 연월일시가 모두 갑술로, 사갑술이고 술()이 개술 자라 놓은 개(낳은 개)’, ‘논개라 했다 한다.

논개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죽자, 천하 건달인 숙부 주달무가 토호인 김 풍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아버렸다. 1578년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는 경상도 안의현 봉정마을 외가로 피신했다. 그러자 김 풍헌이 장수현감인 최경회(1532~1593)에게 논개 모녀의 심문을 요청했다. 그러나 최경회는 논개 모녀의 억울함을 알고 이들을 무죄로 인정,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부인 나주김씨의 시중을 들게 했다. 1579년 논개는 최경회를 따라 무장현, 1582년 영암군, 1584년 영해부, 1587년 사도시정일 때 한양, 이어 1590년 봄 담양으로 왔다. 오래도록 병환에 시달리던 부인이 숨을 거두며 혼인할 것을 권유했던지라, 성년이 된 논개와 최경회는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해 겨울 어머니 순창임씨의 죽음에 최경회는 담양부사직을 사직하고 화순으로 가면서 논개에게 고향 장수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장으로 화순과 장수에서 의병을 모집, 무주의 우지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논개는 이를 도우며 보필했다.

1593년 진주성이 위태롭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된 최경회를 따라 논개는 제2차 진주성전투에 참가했다. 621일부터 강력한 화력의 왜군에 맞서 관군과 의병, 주민들은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28일 불행히도 큰 비가 내려 성벽이 무너져 성은 함락되고, 민관군 6만 명과 최경회 장군도 순절했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남강의 핏빛이 사라지기도 전이다. 왜군은 칠석날 촉석루에서 기고만장, 전승기념 술판을 벌였다. 이때 기녀로 위장한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으로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강낭콩보다 푸른, 양귀비꽃보다 붉은 열아홉 꽃다운 나이였다.

그 뒤, 장수군의 의병들이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수습 고향으로 운구하다, 염천의 시신 훼손을 우려하여 육십령 고개 아래 함양군 금천면 방지리 골짜기에 묻었다.

이 논개를 기리는 장수군 의암사 논개생향비는 1846년 장수 현감 정주석이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을 썼다. 읍내 옛 시장에 있던 이 비석은 일제강점기에 주민들이 부수는 척, 땅속에 묻어 지켰다. 또 장수군청에는 최경회 현감 시절 샘터를 정비하고 심은 은행나무와 논개의 손길이 닿은 천년을 푸르러 그 기상과 절개를 오늘에 표상하는 의암송이 있다.

미증유의 환란인 왜란, 그 마른하늘에 날벼락으로 쓰러진 이름 없는 백성들, 그리고 분연히 떨쳐 일어난 의병들, 그 백성과 의병의 지도자이며 가족과 자신을 지켜준 지아비 최경회, 그들 모두를 사랑했던 여성, 도적의 장수를 유인해 순절을 택한 여성이 바로 주논개다.

그렇게 하루쯤은 왜적이 날뛰던 날, 임금이 버리고 간 땅에서 그 땅을 지키고 살아온 논개의 후예들과 눈 맞춤을 해보자. 장수군청의 의암송은 그냥 소나무가 아니다. 그날을 오늘에 이어주는 자랑스런 선열이다.

장수군청 논개 의암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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