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 71

장성 백양사 고불매

장성 백양사 고불매 백양사의 백암산, 내장사의 내장산은 가을이면 울긋 물들고 불긋 어울려 온 세상이 단풍이다. 하지만 가을 내장, 봄 백암이니, 백암산의 봄을 봐야 두 그림은 마침내 한 폭이 된다.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에 여환이 처음 지었다. 이때 이름은 백암산 백양사, 고려 덕종 3년(1034) 중연이 다시 지어 정토사라 했다. 그러다 조선 선조 7년(1574)에 환양이 백양사라 이름을 바꿨다. 이는 환양의 법화경 독경 소리에 백학봉의 흰 양 떼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양을 부른다’는 뜻의 환양(喚羊)이 법명이 된 연유이다.역사가 천년이 넘은 만큼 여러 이야기가 백양사에 쌓여있다. 그중 백암산 꼭대기 상왕봉 암반 위 고려 시대의 암자 운문암 이야기는 그저 하는 허투루 이야기가 아니다.이 운..

거제 옥포 조선소 용접공 소나무

거제 옥포 조선소 용접공 소나무 청해, 압해, 진해는 앞글자는 다르지만, 그 뜻은 같음이다. 장보고는 남북국 말기의 청해진 대사이다. 청해는 ‘맑은 바다’이니, 안심하고 항해함이다. 후삼국 시기의 능창은 장보고의 위업을 압해도에서 이었다. 별명이 수달인 능창의 바다 압해는 ‘바다를 누름’이다. 왜구 등의 해적을 누름이니, 어부는 물때 맞춰 고기 잡고, 상인의 장삿배는 풍랑을 피해 가고 오면 됐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의 군항은 한국 해군의 모항이다. 1912년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고 곧 군항을 만들었으나, ‘바다를 제압한다’는 진해의 역사는 고려부터이다. 고려 현종 9년인 1018년에 진주에 속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진해현의 시작은 고려 초기로 여겨진다. 여기에 일제가 해군기지를 만든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거제 옥포대첩기념공원 이선지 느티나무

거제 옥포대첩기념공원 이선지 느티나무 이선지는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음력 5월 7일의 옥포해전에서 다친 조선 수군이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전선 24척과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4척이 연합하여 왜장 도도 다카도라의 왜선 26척을 불사른 이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이자, 왜란 최초의 대승이다. 전투가 끝나고 피해 상황을 점검하니 순천 대장선의 활병 이선지가 어깨에 화살을 맞은 게 전부였다. 아니다. 전공에 집착한 원균이 이순신 함대가 이미 사로잡은 왜선을 빼앗으려고 마구 활을 쏘아서 상처를 입은 조선 병사 두 명이 더 있다. 그러니 아군에 의한 피해가 왜군에 의한 피해의 두 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7월 8일의 한산도 대첩에서는 왜군에게 잡혔다 풀려난 조선 백성을 죽이고 왜군의..

한산도 수루 조선 수군 느티나무

한산도 수루 조선 수군 느티나무 통영항에서 한산도로 가는 배를 타면 동쪽은 거제도이고, 서쪽은 통영의 안산인 미륵산이다. 이 뱃길의 아름다움은 그 아름다움마저 잊을 만큼 아름답다. 그러기에 항구와 바다와 섬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려면 이 통영의 뱃길에 다녀온 뒤 말하여도 늦지 않다. 배의 갑판으로 갑자기 갈매기 몇 마리가 날아온다. 초등학교 저학년쯤의 누나와 남동생이다. 아침 햇살이 잘게 부서지는 파도에서 그네를 타던 갈매기를 그 두 아이의 새우깡이 부른 것이다. 이따금 환한 웃음소리가 터지는 건 던져주는 새우깡을 갈매기들이 덥석 챙길 때이다. 그 아이들의 깔깔 웃음소리와 갈매기의 끼룩 소리가 아름다운 화폭을 더 아름답게 색칠한다. 눈앞의 통영 도남항 등대가 연필 모양이다. 이 연필 등대가 ‘꽃’의 시인 ..

해남 대흥사 표충 연리근

해남 대흥사 표충 연리근 한국 남쪽의 큰 절인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를 삼보사찰이라 한다. 삼보는 불교의 수행 주체인 불(佛), 법(法), 승(僧)을 가리키는 말이다. 불보사찰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돌아오며 불경과 불사리를 가져와 창건한 절이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셨기에 주법당인 대적광전에는 불상이 없고 불단만 있다. 해인사는 부처의 말씀인 고려의 팔만대장경이 있어서 법보사찰이다. 송광사는 큰스님들이 많이 배출되어서 승보사찰이다.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이 해인사에서 송광사로 왔고, 그 뒤 제자인 혜심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까지 16명의 국사가 배출되었다. 이 삼보사찰의 이름은 조선 중기 이후에 붙여졌다 하며, 승려 교육과정인 선원, 강원, 율원의 기능을 다 갖추어서 ..

밀양 아랑각 나비 느티나무

밀양 아랑각 나비 느티나무 아랑(阿娘)의 이름은 윤동옥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으나, 연꽃봉오리처럼 예쁘고 향기롭게 자랐다. 조선 명종(재위 1545~1567) 때이다. 아랑은 밀양부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밀양으로 왔다. 밀양강이 흐르며 감싸 안은 밀양은 참으로 아름다운 고을이다. 밀양강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소호리 고헌산에서 발원, 밀양시 삼랑진읍에서 낙동강이 된다. 이 밀양강이 흘러 밀양시에 이르러 아동산을 앞에 두고 섬 하나를 만드는데 마치 누에고치 모양이다. 또 아동산 앞을 지난 뒤 이번에는 둥글게 휘어지며 버섯송이 모양의 둥그스름한 섬을 하나 더 만든다. 이 아동산은 밀양관아의 동쪽에 있어서 얻은 이름으로 마치 거북 모양이다.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물을 마신다고 하여 ‘영구음수형(靈..

나주 공산 오득린 호랑가시나무

나주 공산 오득린 호랑가시나무 오득린(1564~1637)은 고려 때 사정공인 오경진의 7세손이며 나주시 공산면 상방리에서 오숭수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암, 해남, 목포, 진도를 두루 다니며 전황을 살피고 의병을 일으켜 마을을 지키다, 송희립의 천거로 이순신의 수군이 되었다. 정유재란에 옥포, 당포, 명량, 노량 등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나고 역시 송희립의 상소로 1605년 선무원종일등공신의 녹훈을 받았다. 1598년 노량해전을 앞둔 때이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왜군에게 철수령이 내려졌다. 이를 알고 조명연합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 왜교성을 수륙으로 포위했다. 이때 명의 진린은 왜군과 전면전보다 화의 협상을 하면서 뇌물까지 받았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

부여 가림성 깃발 느티나무

부여 가림성 깃발 느티나무 ‘벌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다.’ 이 글은 부여국립박물관에 옮겨놓은 당나라 장수 ‘유인원기공비’에 새겨져 있다. 이 글의 벌과 고슴도치는 백제 유민과 부흥군을 일컫는다. 660년 7월 의자왕의 항복으로 백제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662년, 신라 문무왕 2년이다. 백제부흥군과의 전투에 나선 나당연합군은 지세가 험하고 견고한 가림성을 피해 곧장 주류성(부안 우금산성)으로 갔다. 663년 마침내 주류성의 함락으로 부흥, 백제의 희망도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672년경까지 백제 유민들의 항거가 이어졌으니, 그 중심지가 바로 가림성이다. 이와 관련한 삼국사기의 내용이다. ‘664년 3월, 가림성의 백제 부흥군이 사비성의 신라군을 몰아내고 되..

하동 옥종면 강민첨 은행나무

하동 옥종면 강민첨 은행나무 거란족은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은 물론 몽골까지 차지하며 요나라를 세운 북방 기마민족이다. 이 거란족이 크게 3번 고려에 쳐들어왔으니, 993년(성종 12)의 1차, 1010년(현종 원년)의 2차, 1018년(현종 9)의 3차가 그것이다. 이때의 영웅이 강감찬이다. 거란과의 2차 전쟁 때에 모두가 항복을 말했으나, 강감찬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이에 현종은 ‘강공책을 쓰지 않았으면 우리 모두 좌임(左衽)이 되었을 것이다.’며 강감찬을 문화평장사에 임명했다. 좌임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이니 곧 머리 풀어헤치는 거란족을 가리킨다. 이렇듯 거란 대신 여진이 북방의 패자가 되게 한 강감찬의 귀주대첩, 수나라를 무너뜨린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왜의 도쿠가와 막부시대를 연 이..

능주 쌍봉사 대웅전 감나무

능주 쌍봉사 대웅전 감나무 화순 이양면 쌍봉사 절집은 그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 839년 신라 신무왕 때 적인선사 혜철이 하안거를 보냈다 하니 오래된 절집이구나 할 뿐이다. 또 문성왕 9년인 847년에 22년간의 당 유학을 마치고 금강산 장담사에 머물던 쌍봉화상 철감도윤이 이곳에 있었다. 절 이름 쌍봉사는 속성이 박씨로 이곳에서 입적하여 철감의 시호를 받은 쌍봉 도윤의 부도탑과 탑비, 우뚝 솟은 중조산 두 봉우리가 절을 향해 고개 숙인 것과 인연이 닿아있다. 장보고는 젊은 시절 당나라 쉬저우(徐州)의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었다. 용맹하여 말을 타고 창을 쓰면 감히 맞설 자가 없었다. 828년 신라 흥덕왕에게 당나라 해적의 노략질과 사고파는 노비의 근절책을 주장하고, 이의 해결책으로 완도 장도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