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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굴포리 윤선도 소나무

운당 2022. 11. 27. 06:52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는 진도의 남서쪽이다. 여기에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가 있으니, 원둑이라고 하는 굴포리 간척지의 윤선도 제방이다.

윤선도가 60세 때인 1646년이다. 이 무렵 인조 때 전라도관찰사,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가 진도에 유배되었다. 윤선도 역시 이 무렵 진도에서 화이정승 삼수(和李政丞 三首)’라는 시에 이경여(李敬輿)가 진도에 있는 병술년(1646)’이라 썼다. 이를 근거로 여기 간척지 축조 시기를 윤선도가 완도 보길도와 진도를 오가던 1640년부터 1660년 사이로 추정한다. 1646년 무렵 윤선도는 이곳 굴포리 처자 경주 설씨와 혼인했고, 12녀를 낳았다.

그렇게 윤선도는 간척사업을 통해 완도군 노화읍 석중리에 130여 정보,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200여 정보의 갯벌을 농토로 만들어 주민을 돕고 부를 축적했다.

윤선도의 이러한 개척정신과 간척사업은 조상에게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조부 윤의중은 장흥, 강진, 해남, 진도 등지의 해안에 방죽답인 언전(堰田)이 많았다. 또 그의 후손에게도 이어져 증손으로 자화상을 그린 윤두서는 해남 현산면 백포만에 간척지와 염전을 만들어 가뭄에 시달리는 주민을 도왔다. 또 윤두수의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 간척사업을 위한 방조제 및 배수문 축조 방법을 썼고, 수원성 설계와 축조를 주도했다.

그렇게 1235년 몽골의 침입에 방어용 연안 제방을 시초로 하여 이루어진 간척사업이 조선 시기로 이어졌는데, 민간 간척사업을 선도한 집안이 윤선도 일가였다.

윤선도가 이곳 굴포리에 원둑을 쌓을 때의 일화가 전설처럼 있다. 윤선도는 이곳 사람들과 함께 제방을 쌓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큰 파도에 쉽게 무너져버렸다. 다시 쌓으면 무너지고 쌓으면 또다시 무너져서 깊은 시름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는데 제방을 쌓는 곳으로 큰 구렁이가 기어갔다. 꿈을 깬 윤선도가 제방을 쌓는 곳으로 가보니 꿈속의 구렁이가 기어가던 자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려있었다. 윤선도는 뱀이 지나간 형상으로 석축을 쌓도록 했고 그 뒤부터 둑은 무너지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진도는 쌀이 귀했다. 태어나서 결혼 전까지 쌀 한 말을 먹었으면 부잣집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쌀은 곧 금이었다. 따라서 굴포리 간척지는 여기 사람들에게 그 귀한 하얀 금을 먹게 해 주었다.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이곳 굴포, 남선, 백동, 신동 마을 주민들이 고산사와 굴포신당에 윤선도의 신위와 당신인 할머니 신위를 모시고 정월 대보름에 당제를 지냈다.

하지만 그 사당과 신당이 태풍으로 무너진 뒤, 1959년에 삼별초 장군인 배중손 사당이 들어섰다. 그리고 60년 넘게 오랫동안 불편한 동거를 하다가, 2021년에 배종손의 절충사는 용장산성으로 옮겨갔다.

이유야 어떻든 이곳 원둑의 윤선도 고산사와 할머니 신당은 그동안 배중손 사당으로 잘 못 알려졌다. 뒤늦게나마 제 자리를 찾았으니, 다행이다. 이를 통해 역사를 바로 세우거나 잡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멈추거나 외면할 수는 없다. 끊임없이 바로 세우고 바로 잡아가야 한다. 하지만 한 마디로 역사를 바로 보며 사는 게 참으로 어렵디야이다.

그렇게 제 이름을 되찾은 이곳 고산사의 굴포리 신당을 지키는 소나무 이름은 고산송이다. 소나무 나이가 250여 살이니 원둑 축조 시기에 윤선도가 심었던 소나무의 아들뻘 나무이다.

그동안 우리들이 역사를 잊고 진실을 버려두고 있을 때도, 늘푸른 청정함으로 고산사와 할머니 신당을 꿋꿋이 지켜온 고마운 소나무이다. 새삼 고산송을 우러르다가 깊이 허리 숙인다.

진도 굴포리 윤선도 소나무